[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충남 당진(상)- ‘신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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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3   |  발행일 2018-04-13 제36면   |  수정 2018-04-13
한국의 ‘카타콤베’…고통·죽음 뒤에 얻은 신앙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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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이었고,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고, 내포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그것은 푸른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처럼 보였다. 긴 주랑은 순례자들처럼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바람 한 점 없었으며, 소음 한 토막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겁지 않았다. 대지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가벼움이었다. 시인 이종형의 노래 중 이런 구절이 있다.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 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라는. 이곳에서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가벼움이 자유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합덕들의 작은마을
1972년 무덤 40기 파묘, 묵주 쏟아져
발견된 시신 중 32구는 목 없이 나와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천주교 거점
주민들 전체가 신자…가장 큰 교우촌

조선 천주교 교구장 다블뤼 주교
1866년 병인박해 순교직전 신리 기거
103위 성인 탄생…韓 가톨릭의 성지
주교관 복원·순교자 기념관 등 조성
다섯 성인의 영정·기록화 13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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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성당. 충청 최초의 본당이었다.

◆ 합덕읍 신리

충남 예산에 가야산이 있다. 산 앞뒤의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 하는데 예산·당진·서산·홍성 등을 일컫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땅이 기름지고 넓어서, 또한 소금과 물고기가 많아서, 수려한 맛도 기묘한 경치도 없지만,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했다. 넓고 기름진 땅은 내포평야(內浦平野)다. 특히 예산군과 당진시에 걸쳐 있어 보통 예당평야라고 부른다.

당진의 동남부 삽교천 변에 너른 들을 가진 합덕읍(合德邑)이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합덕제에서 연원한 이름이니 농사를 주력으로 살아온 역사가 길다. 들은 내포평야이기도 하고 예당평야이기도 하고 특별히 합덕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1972년 합덕들의 작은 마을에서 과수원을 개발하기 위해 무덤 40여 기를 파묘했다. 묘에서 묵주가 쏟아져 나왔다. 주워 모은 묵주가 한 됫박이 넘었다. 발견된 시신 중 32구는 목이 없었다. 그 작은 마을이 합덕읍 신리(新里)다.

사방이 들이다. 참 많이 뺏기고 살았겠다.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면 삽교천으로 배가 드나들었다. 그 배를 타고 많은 것들이 들고 났다. 신리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초기 천주교 순교자이자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이후다. 마을에는 밀양손씨가 많이 살았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1865년부터는 조선 천주교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살았고, 그즈음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신자였다.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우촌이었고,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고, 내포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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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의 1만평 대지에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딴 경당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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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블뤼 주교관.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2004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 신리 성지

다블뤼 주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하기 전까지 신리에 살았다. 훗날 성인에 오른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인 다섯 칸 초가가 그의 주교관이자 마을의 비밀 성당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그곳에서 한국 교회사를 위한 비망록, 한국 순교사를 위한 비망기, ‘한불사전’ 등을 썼고 그가 남긴 기록은 한국의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당시 조선 포교를 위해 파견된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 손자선과 황석두 루가 등이 주교관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체포돼 처형되었고 신리 교우촌은 몰살당했다. 단일 마을로서는 가장 많은 희생이었다. 그 모든 고통과 죽음 뒤에 얻은 것이 신앙의 자유다.

1927년 지역 교우들이 모금을 통해 집을 사들이고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허물어진 주교관은 함석지붕을 올린 신리공소가 되었다. ‘천주교를 믿다가 몰살당한 마을’ 또는 ‘천주교 하던 사람의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신리 합덕들 한가운데에 성지가 조성되었다. 다블뤼 주교관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동상과 성당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너른 대지에는 순교한 다섯 성인의 이름을 딴 경당이 정물처럼 놓여 있다. 신리는 국내 대표적인 가톨릭성지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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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내 성당. 외벽에 예수님과 다섯 성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순교자기념관

성지 내에서 가장 높은 것이 순교자기념관이다. 내포의 들을 상징하는 낮은 구릉 위에 2층 규모의 탑이 서 있다. 꼭대기의 십자가는 메마르고 헐벗은 사람의 무한한 포옹을 닮았다. 내부로 들어가는 주랑은 은은한 그늘과 고요로 채워져 있다. 건물 지하는 순교미술관이다.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의 영정과 신리 기록화 13점이 전시돼 있다.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방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투명하게 보이는 듯한, 맑은 동양화다. 오만원·오천원 지폐의 신사임당과 이율곡 영정을 그린 이종상 화백의 작품이라 한다.

사람들은 신리 성지를 ‘한국의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로마시대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피신처이자 교회이고 무덤이었던 그곳이 신리의 역사와 닮았다고 여긴다. 그래선지 구릉 속 어두컴컴한 내부 공간은 무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고대의 지하 유적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무거움은 없다. 과거를 향해 천착해 들어가면서도 함몰되지 않았다. 신리성지는 맑고, 밝고, 낮고, 예쁘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평온하다. 기립한 사람들, 걷는 사람들 모두가 마치 낮잠처럼 엎드린 듯하다. 이 봄날 가만 엎드려 폭폭 숨 쉬는 사방의 평야들마냥.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합덕성당

당진 합덕읍에 들어서면 눈 닿는 곳마다 뾰족한 종탑이 있다. 그만큼 성당과 교회가 많은 동네다. 신리성지와 멀지 않은 곳에 충청 최초의 본당이었던 합덕성당(合德聖堂)이 있다. 뒤편으로 합덕제(合德堤)와 버드나무 둑길이 바라다보이는 멋진 장소다. 성당의 전신은 1890년 예산 고덕면에 세워진 양촌성당이라 한다. 초대 본당주임인 퀴를리에 신부가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해 한옥성당을 짓고 합덕성당이라 이름을 바꾸었고 1929년에 7대 주임 페랭 신부가 현재 건물인 벽돌조의 고딕성당으로 다시 지었다. 성당에는 6·25전쟁 때 납북된 페랭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스승 매스트로 신부의 묘소가 있다.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으로 가다 회덕분기점에서 30번 대전~당진 고속도로를 탄다. 고덕IC로 나가 40번 도로를 타고 합덕 방향으로 가다 신촌초등학교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신리다. 신리성지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성 다블뤼 기념관의 순교미술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며 낮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다. 개관시간 종료 30분 전까지 입장할 수 있으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입장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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