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영웅’이 안 된 罪

  • 송국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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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9   |  발행일 2018-04-09 제30면   |  수정 2018-04-09
MB·朴정권의 추진 시책을
성실 수행한 공무원들마저
적폐로 몰려 불이익받으면
공직사회 복지부동 불보듯
관료는 정권논리 벗어나야
[송국건정치칼럼] ‘영웅’이 안 된 罪

관가에서 ‘JP 지수’란 용어가 나돈다고 한다. ‘적폐’의 첫 자음을 알파벳으로 바꾼 게 ‘JP’라고 하니, 공직사회의 자조섞인 신조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적폐청산을 1호 국정과제로 내 건 문재인정부에서 적폐 공무원은 어떤 부류일까. 무능하고 타성에 젖은 공무원일까, 아니면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핵심 부서에서 일했던 공무원일까. 관가에 나도는 말을 들어보면 안타깝게도 후자(後者)를 의미한다. 가령 보수정권에서 대북정책(통일부), 위안부협상(외교부), 사드배치(국방부), 국정교과서(교육부), 4대강사업(국토부), 해외자원개발(산업통상자원부) 같은 일을 했다면 책임자든 실무자든 JP 지수가 높다고 한다. 당연히 인사를 포함해 각종 불이익도 뒤따른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청와대의 지시로 각 부처에 설치된 ‘적폐청산 TF’가 1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공직사회에 불신과 복지부동이 심각한 수준이란 말이 들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공무원은 ‘늘공’과 ‘어공’이 있다고 한다. 늘공은 ‘늘상공무원’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행정·사법·입법부에 속한 정통관료들이다. 어공은 ‘어쩌다 공무원’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청와대와 국정원, 공기관에 투입되는 별정직이다. 정권의 창업공신들이 주로 맡는 어공은 해당 정권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들은 집권 5년 동안 정부 각 부서에 낙하산을 타고 투입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권한이 있으면 책임도 따른다. 국정운영과정에서 나라에 누를 끼쳤으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구속된 전직 고위급들은 대부분 어공이다. 개별적으론 억울하게 휩쓸려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론 공동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집권자가 방향을 잘못 잡고 있음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면서도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면 정권에 부역한 꼴이기 때문이다.

늘공은 다르다. 그들은 전 정권에서도 다음 정권에서도 늘상 공무원이다. 한 정권 아래서도 이리저리 부서를 옮겨 다닌다. 늘공이 속한 부서의 업무는 큰 틀에서 보면 청와대와 권력기관에 있는 어공이 방향을 잡는다. 늘공은 책임자든 실무자든 현장에서 업무를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권한이 제한적이니 책임도 제한적이어야 한다. 해당 정권에서 추진한 핵심 과제를 제대로 실행했는지만 평가해서 근무지수를 매기는 게 합리적이다. 지금 정권이 적폐로 규정한 전 정권의 업무를 실행했다고 JP지수를 높게 주면 안 된다. 그러면 새로 들어선 어공이 추진하는 신규 사업에 몸을 던져 일할 늘공은 없어진다. 다음 정권에서 철퇴를 맞을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이런 현상은 새 정권의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구(舊)정권의 부역자로 몰린 늘공에 대해서도 ‘왜 부당한 정책을 거부하지 않고 실행했느냐’고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또한 부당한 지적이다. 어느 정권이든 나라를 말아먹자고 시작하진 않는다. 나름대로 철학이 있고 국정운영의 방향성을 갖는다. 구정권에서 옳다고 판단한 일이 현정권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청산 작업이 되풀이 된다. 따라서 늘공들에게 사상과 이념까지 담긴 정부정책을 평가해서 부당한 건 거부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다. 또 이런 지적은 ‘당신은 왜 그 때 영웅이 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어공은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늘공만이라도 각 정권의 논리에서 자유롭게 해주면 공무원사회의 자율성과 창의력이 한결 높아지지 않을까. 물론, 늘공 중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을 만한 정책을 갖다 바치기도 하지만 그런 부류는 논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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