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쏙쏙 인성쑥쑥] 길흉은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惟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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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9 07:56  |  수정 2018-04-09 07:56  |  발행일 2018-04-09 제18면
[고전쏙쏙 인성쑥쑥] 길흉은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惟影響)

#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봄비라도 흠뻑 맞아보고 싶어 학교에 일찍 출근하는 길이었습니다. 5학년 학급 아이 2명이 함석 물뿌리개를 들고 꽃을 심은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호랑이 담임교사를 본 두 아이는 다소곳해졌습니다.

순둥이가 “선생님, 철식이가 비가 오는데도 화단에 물을 주라고 했어요”하고 어물어물 말을 꺼냈습니다. 철식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래도 선생님이 물을 주라고 한 것은 지켜야 하잖아!”라고 씩씩거렸습니다.

비가 오더라도 물을 주자는 철식이와 비가 오니 물을 주지 말자는 순둥이가 서로 다투었던 모양입니다. 풋내기교사는 갈등이 생겼지만 아이들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큰소리로 “선생님 말씀은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야 하고, 비가 오면 물을 주지 말아야 하잖아!”하고 두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엄청난 모순의 말에도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필자의 초임교사 시절을 성인이 된 두 제자가 전해준 부끄러운 그림자입니다.

# 학교 뒤쪽 골짜기를 따라 2㎞쯤 가면 경치 좋은 곳에 100여 명이 앉을 만한 커다란 바위 ‘대왕암’이 있었습니다. 봄·가을이면 학교에서 단골로 소풍을 가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도 2㎞ 더 떨어진 산기슭엔 화전을 일궈 담배농사를 짓던 외딴 집에 유철이가 살았습니다. 유철이는 학교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지게에 태우고 교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유철이의 두꺼운 외투 위로 손을 얹은 담임교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쿵당! 쿵당!”하고 가슴이 뛰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유철이는 불치병에 걸린 아이였지만 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를 졸라서 학교에 오던 유철이의 결석이 잦아졌습니다. 집에 있는 날이면 유철이는 산기슭 외딴집 봉당에 앉아 산을 향해서 “철식아!, 순둥아!선생님!”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반대편 산에서도 “철식아! 순둥아! 선생님!”하고 메아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봉당에 앉아 메아리를 만들던 유철이는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산골짜기 어디에도 사방으로 전해지는 메아리를 들을 곳은 없었습니다. 메아리만 남았습니다.

# 순(舜)임금, 섭정을 하던 우(禹), 신하 익(益) 세 사람이 토론을 합니다. 우가 “도리에 순응하면 길하고(惠迪吉), 도리를 거스르면 흉하니(從逆凶), 길흉은 그림자와 메아리 같습니다(惟影響)”고 말문을 엽니다. 신하 익이 “도리를 어기면서까지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뜻을 저버려서까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마십시오”하고 간언합니다. 순 임금이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선행을 추구하는 말이라면 이를 받아들여 실천하세요”라고 합니다. ‘유영향(惟影響)’을 일러줍니다.

요즘도 비를 맞으며 화단에 물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반드시 사연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림자를 찾으려면 아름다운 빛이 있어야 합니다. 메아리를 들으려면 산의 숲도 보고 나무도 보아야 합니다. 모두 일깨워야 합니다. 도리에 순응하면 길(吉)하니까요.

박동규(전 대구중리초등 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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