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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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9 07:51  |  수정 2018-04-09 07:51  |  발행일 2018-04-09 제15면
[행복한 교육]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김희숙 <대구 도원중 교감>

김천 예지리의 오두막에 봄이 왔다. 자고 일어나면 산골짜기 나무들이 성큼성큼 앞마당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사이에 산 벚꽃과 복숭아꽃이 저렇게 연분홍을 피워 올렸다. 봄눈이 퍼붓고 비도 자주와 골짜기마다 물이 넘친다.

언니는 자식 때문에 돌덩이를 가슴에 얹고 35년을 살았다. 자폐증이란 말도 낯설었던 그 시절, 자기 세계 속에 있는 아들과 세상을 이어주느라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수십 차례 오갔다. 예지리의 7평 남짓 예쁜 새집 같은 쉼터는 상처받고 피폐해진 스스로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호미 한 번 쥐어보지 않았지만 농사꾼 이상으로 땀을 흘려 튼실한 감자와 고추와 배추와 무를 수확했고 숲밭골 어르신과 어울렸다. 인맥 좋고 수완 좋다고 평판이 난, 금융기관 수장까지 지낸 형부였지만 자식의 부족함을 끌어안고 앞길을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주는 건 젬병이었다.

조카가 중학생이었을 때 사춘기 악동들은 4차원 정신세계에, 행동도 굼뜨고 어눌한데다 공부는 제법 하는 이 아이가 몹시 못마땅하고 불쾌했다.

조마조마하던 3월 말쯤 교장선생님의 호출이 왔다. 조카가 현관 유리를 고의로 깨트렸다는 것이었다. 손등을 싼 붕대에는 피가 배어나왔고 눈물범벅이 된 조카가 교장실에 꿇어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과학의 달 행사를 하면서 사용한 물감과 크레파스로 조카가 정성스럽게 그린 상상화에 물감을 끼얹고 책과 가방에 온갖 낙서를 하고 놀리기까지 한 것이었다. 언니는 용서를 구하며 아들이 교실에서 한 달간 당한 일을 손편지로 썼다. 더 단정하고 더 깨끗하게 교복을 다려 입혔다. 그러나 매번 그 뽀얀 셔츠에 볼펜, 사인펜으로 개념 없이 쓴 낙서를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졌다.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때라 ‘내 자식 못난 탓’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만사 뜻대로 이루소서’의 꽃말을 가진 제비꽃, 시멘트 갈라진 틈으로 보랏빛이 귀엽게 올라온다. 제비꽃이 있는 곳에는 꼭 개미집이 있다. 개미가 꽃씨를 물어다 제 구멍에다 놓으면 그곳에서 제비꽃이 피어난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제비꽃씨에는 엘라이오솜이라는 것이 묻어 있는데 개미는 필요한 단백질인 엘라이오솜만 가지고 개미집 안으로 들어가고 씨는 개미집 밖으로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숙해도 꽃부리가 열리지 않는 폐쇄화인 제비꽃이 개미집 근처 좁은 곳에서도 꽃을 피운다고 한다.

중학교 때까지는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참으로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잠시 엘라이오솜(?)이 떨어지면 또 혼자가 되었다. 4년제 컴퓨터학과를 졸업했지만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조카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공공기관 의무고용제를 활용했지만 오히려 퇴행이 일어날 정도로 움츠려 들었다. 그런 조카에게 근래에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 중학교 시절 괴롭히던 급우가 자전거 매장을 하는데, 조카가 거기에 들러 일주일에 한두 번 커피를 마시고 온다는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냈던 것이 작은 꽃으로 피었다. 이 소식이 온 집안 가족에게 큰 감사와 행복을 주었다. 인생이란 게 다가오는 매 순간순간을 느끼고 살아내는 것이구나.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쁜 일과 슬픈 모든 순간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구나.

3월이 유난히 힘든 학생이 있다. 관계 맺기가 어려운데 짝꿍은 울타리를 친다. 울타리를 치더라도 그 울타리가 싸릿대거나 얕은 흙담이면 좋겠다. 그래서 그 경계 너머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섣불리 아이들의 경계를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한다. 경계 사이에 사립문을 내어 바람처럼 마음도 오갈 수 있도록 사랑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김희숙 <대구 도원중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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