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지막한 우리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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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2   |  발행일 2018-04-02 제29면   |  수정 2018-04-02
[기고] 나지막한 우리 학교
이정연 시인

며칠 전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집 근처 매호천을 따라 걷다 간만에 좀 더 걷기 위해 금호강변까지 나갔다. 한참 걷다 벤치에 앉아 쉬었다. 수성구쪽 강변에 앉아서 동구를 바라보노라니 강 건너 도시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낮 동안 근무하는 학교의 위상이 또렷하게 파악된다. 우리 학교 주변에만 높은 불빛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왼쪽 오른쪽엔 높은 불빛들이 보이는데, 우리 학교 주변만 확연하게 불빛들이 나지막하다. 우리 학교는 비행기길 아래에 있어서 운동장에서 보면 비행기 배 부분이 보인다. 너무 가까워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인지 이니셜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 학교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들어설 수가 없다. 근처에 혁신도시도 생기고 도시가 외곽으로 계속 확장되면서 아파트 단지들이 조성돼 인근 다른 학교들은 그나마 여건이 좋아졌지만 우리 학교는 앞으로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건물의 높낮이로 인간의 높낮이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여러 수치와 상관관계가 꽤 높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아침에도 그랬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딸아이가 자기 반 진단고사 영어 평균을 얘기했다.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일주일도 안 돼 친 진단고사 영어 반평균이 29.9점이란다. 그게 말이 되나? 참고로 말하자면 총 30문항이고 한 문항이 1점이다. 출근해 우리 반 아이들의 성적을 다시 살펴보았다. 우리 반 16명 중에는 30점이 4명뿐이다. 20점이 안 되는 애들도 4명이다.

사는 동네, 그러니까 집값, 다시 말하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아이의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이 정도다. 우리는 매일 그런 아이들을 만난다. 영어 선생님은 아이들이 대문자 소문자를 다 못 쓴다고 답답해하고, 수학 선생님은 구구단을 못 외우는 아이들이 있어 걱정하고, 음악 선생님은 아이들이 계이름을 모른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영어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대로 단어 하나라도 더 익히게 하려고, 수학 선생님은 그날 가르친 개념을 이해시켜 간단한 문제를 풀 수 있게 하려고, 국어 선생님은 그날 덜 쓴 글은 마저 쓰고 가라고 방과후에 남긴다. 이 과목 저 과목 끌려 다녀야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힘든지 학생이 쓴 글을 보고 알았다.

‘나이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중학생이 되니 숙제 안 했다고 계속 끈질기게 하라 하고 잔소리도 엄청 많고 숙제 안 했다고 뭐라 해서 너무 힘들다.’

한 녀석은 몇 번 도망을 쳐보다 도망치면 더 힘들어지는 걸 알았나 보다. 남아서 하기 싫으니 수업 시간에 했고 지금 하지 말고 수업부터 들으라고 했는데도 계속해 책상을 톡톡 쳤더니 다음 시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담임이 그 아이를 데리고 교정을 거닐며 달래고, 혼낸 선생님은 미안해하며 자신을 자책한다. 교사들은 ‘쌔’가 빠진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 보려고 고성과 반항을 주고받으며 ‘쌔’가 빠져도 이 아이들을 내팽개치지 못한다.

지난 주는 친구사랑 행복주간이었다. 반 별 행복사진 찍기도 했고, 학교 라디오 방송에 사연 보내고 아침 방송으로 들려주기도 했고, 어제 아침에 친구한테 쓴 편지는 오늘 와 보니 온 학교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마지막, 레드카펫 행사 날이었다. 예쁘게 만든 아치 아래를 지나 레드카펫을 걸어올 동안 교사와 전교학생회 학생들이 양쪽에 서서 인사를 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학생기획 선생님이 교사들에게도 드레스코드로 ‘레드’를 정해주었다. 1학년 아이들한테 줄 장미 102송이를 샀다. 이런 환대를 처음 받아보는 1학년 학생들은 특히 더 어쩔 줄 몰라 하며 레드카펫에 들어섰다. 선생님들이 이름을 부르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장미와 함께 “사랑해~ ”라고 아침인사를 건넸다.

레드카펫을 밟고 교실로 간 아이들과 장미가 싱그럽게 피어서 그날 수업은 더 행복했다. 너무 조용해서 걱정이던 여학생반도 “안녕하세요~”라며 크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 시간 남학생 반에서는 장미를 보며 의인법 만들기를 했다. 장미가 자살했다, 장미가 와인을 마신다, 장미가 닭다리를 뜯어 먹는다.

이정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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