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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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2 07:55  |  수정 2018-04-02 07:55  |  발행일 2018-04-02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나비

3월 폭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벚꽃이 만발해 천지가 환하다. 공원과 거리의 크고 작은 화단에는 나비들이 분분한 날갯짓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하며 춘흥을 돋우고 있다. 나비는 한순간도 직선으로 날지 않는다. 좌우상하로 높낮이를 바꾸며 지그재그로 날아간다. 봄날 같은 짧은 생애가 너무 소중해 잠시도 같은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깨어나 말했다는 장자의 ‘호접몽(蝴蝶夢)’을 떠올려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아들인 사랑의 신 에로스(Eros)가 사랑에 빠졌던 여인도 나비라는 뜻을 가진 프시케(Psyche)였다. 영화 제목 ‘빠삐용(Papillon)’ 역시 나비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다. 나비는 동서양에서 생의 덧없음, 남녀의 사랑, 자유 등을 상징한다.

“남편은 조그마한 가게를 합니다. 수입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아이가 셋입니다. 명문대 들어가기가 너무 어렵고, 졸업하고도 집에서 놀고 있는 이웃집 총각을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그런 걱정보다 지금 당장 아이들 뒷바라지가 막막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아요. 여기 오는 길에 나비가 봄꽃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서 계속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한참 가로수 밑에 서 있었습니다. 나비처럼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었어요. 몸도 아프고 이제 아무 희망이 없어요.” 어느 엄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가 아직 수용소 막사에 누워 있던 유대인 아이들을 보살피러 갔다가 나무 침대 여러 곳에 그려진 나비를 보았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물고기를 공동체적 결속의 상징으로 삼았듯이, 수용소 아이들도 혹독한 고통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일종의 형제애의 표시로 나비를 그린 것은 아닐까라고 박사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나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을 거부했지만 마침내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 나비들은 우리와 같아요. 이 고통받는 육신은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지금의 우리는 애벌레와 같아요. 어느 날 우리 영혼은 이 모든 더러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날아오를 거예요. 나비를 그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일깨워주곤 했어요. ‘우리는 나비다. 우리는 곧 날아오를 것이다’라고 말이에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나비는 변태(變態) 능력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도 나비와 같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꿈을 꾸며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면 언젠가는 현재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 굼뜨고 보기 흉한 애벌레에서 허물을 벗고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며 나만의 아름다운 화원(花園)을 그려보자. 이 찬란한 봄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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