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6] 영천 횡계구곡(下)...고목·바위 병풍처럼 두른 제4곡 옥간정…구곡 최고의 풍광 자랑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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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2 08:15  |  수정 2021-07-06 14:52  |  발행일 2018-03-22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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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곡에 있는 정자 옥간정과 주변 풍경. 두 형제가 1716년에 세운 정자로, 횡계구곡 중 가장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사곡이라 광풍대 제월대 바위이니(四曲光風霽月巖)/ 바위 가에 꽃과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巖邊花木影)/ 군자가 문장을 이루는 일 알고자 한다면(欲知君子成章事)/ 이 못에 물이 채워지는 것을 보아라(看取盈科此一潭)’

4곡은 옥간정(玉磵亭)이다. 옥간정은 정만양·규양 형제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에 세운 정자다. 계곡 가 암반 위에 지은 정자로 주위에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들이 무성하다. 건너편에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옥간정은 시내와 바위, 정자, 나무들이 어우러져 지금도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두 형제는 나무와 꽃들이 드리운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군자가 문장을, 학문을 이루는 일을 알고자 한다면 못에 물이 채워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흘러오는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워야 다시 흘러갈 수 있는 것처럼, 학문도 경지에 오르려면 꾸준히 수양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옥간정 건너편 바위에 ‘제월대(霽月臺)’ ‘광풍대(光風臺)’ ‘지어대(知魚臺)’ ‘격진병(隔塵屛)’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집에 실린 ‘계장사십영(溪莊四十詠)’을 보면 이 바위를 읊은 시들이 나오는데, 두 형제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 중 ‘제월대’와 ‘광풍대’다.

‘비온 뒤 하늘빛 맑고(雨後天光淨)/ 제월대 주변 달빛 더욱 새롭네(臺邊月色新)/ 염계(주돈이)가 가졌던 천년의 뜻을(濂溪千載意)/ 어느 누가 다시 헤아릴까(料得更誰人)’

‘광풍대 버드나무 냇가에 푸르고(臺柳吟邊綠)/ 광풍은 얼굴 위에 불어오네(光風面上吹)/ 내가 깨달아 알았던 것은(自家理會處)/ 옛사람이 알았던 것이네(要向古人知)’

◆구곡 중 중심 굽이인 5곡 ‘와룡암’

‘오곡이라 구불구불 경계는 더욱 깊고(五曲境轉深)/ 와룡암 위는 푸른 숲이 덮여 있네(臥龍巖上覆靑林)/ 구름 일으켜 비 내림은 너의 일 아니니(興雲作雨非渠事)/ 완연히 자재한 마음에 맡겨놓을지다(任是頑然自在心)’

5곡은 와룡암(臥龍巖)이다. 옥간정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나온다. 계곡에 자리한 널따란 바위다. 이 굽이 근처에 정규양이 1701년에 새 거처를 마련한 뒤 ‘육유(六有)’라는 당호를 지어 편액을 달았다.

‘신사년에 비로소 복제를 마치고 선생은 횡계 수석을 사랑해 드디어 집을 옮겨 거처를 정했다. 먼저 와룡암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육유(六有)라고 편액했다. 대개 시냇물의 이름이 횡거(橫渠)와 가깝기 때문에 장 선생(장횡거)이 남긴 말을 취해 경계하려는 것이었다.’


계곡 암반에 세운 ‘4곡 옥간정’
정씨 형제가 심신수양 하던 곳

육유재 거처 지은 ‘5곡 와룡암’
朱子 무이정사 전통 이어받아

횡계저수지 하류 ‘8곡 채약동’
선계 비유하며 은자의 삶 염원



집의 이름을 ‘육유재’라 한 것은 횡계가 송나라 유학자 장횡거와 닮은 점이 있어서 그가 남긴 말에서 가져왔다고 했는데, 육유는 그의 저서 ‘정몽(正蒙)’ 중 유덕(有德) 편에 나온다.

‘말에는 교훈이 있어야 하고, 동작에는 법도가 있어야 하고, 낮에는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터득한 바가 있어야 하고, 숨 쉬는 사이에도 양성하는 공부가 있어야 하고, 눈 깜짝하는 사이에도 존심(存心)하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구곡경영에 있어 5곡은 대체로 그 주인공에게 의미 있는 굽이다. 무이구곡의 5곡에 주자의 무이정사가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선비들에게도 계승되어 5곡은 중심 굽이로 인식되어 가장 의미 있는 처소에 설정되었다. 횡계구곡의 5곡 와룡암도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정규양이 이곳에 자리 잡고 나자, 정만양이 왕래하거나 유숙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원근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면서 문밖에는 언제나 신발이 가득했다고 한다.

‘육곡이라 바위 사이 푸른 물굽이 흐르고(六曲巖間漱碧灣)/ 농부는 나무 깎아 산문에 걸쳐 놓았네(農人木駕山關)/ 무더운 날씨에 삽을 메자 물결이 비가 되니(炎天荷波成雨)/ 시냇물이 등한하다 말하지 마라(休說溪流只等閒)’

6곡은 벽만(碧灣)이다. 농부가 삽을 메고 나가 푸른 물굽이에서 물길을 내는데 논밭으로 흘러드는 물이 비가 오는 듯하다며, 시냇물이 무관심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읊고 있다. 시내에 흐르는 물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선 사는 곳에 비유한 ‘채약동’

‘칠곡이라 새 제방 칠리의 여울이고(七曲新堤七里灘)/ 곳곳에 기이한 바위는 올라 볼 만하네(奇巖處處可登看)/ 우거진 숲은 분에 넘치게 바다같이 깊어서(穹林分外深如海)/ 오월에도 가슴이 눈을 담은 것처럼 시원하다네(五月胸襟雪碗寒)’

7곡의 신제(新堤)이다. 새로 쌓은 제방이라는 말로 보아 당시에 새 제방을 축조했던 모양이다. 이 신제의 위치에 대해 현재의 횡계저수지가 있는 곳에 제방이 있었다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다. 횡계저수지의 제방은 일제 때 기존의 제방이 있던 곳에 둑을 쌓아 현재의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고향인 정원재씨(대구시 달서구 부구청장)는 횡계저수지 둑에서 하류쪽으로 300m 정도 내려온 지점이 정확하다고 들려줬다.

‘팔곡이라 안개가 낮에도 걷히지 않고(八曲煙嵐晝未開)/ 가파른 언덕 높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물 내려보네(斷崖高處瞰)/ 소나무 아래서 번거롭게 서로 묻지 마라(休從松下煩相問)/ 깊은 산에서 약 캐어 달빛 받으며 돌아오리니(採藥深山帶月來)’

8곡은 채약동(採藥洞)이다.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 뒤쪽 계곡이다. 소나무 군락이 있는데 횡계저수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이 굽이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채약이다. 일찍이 고송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독송고(獨松皐)라 했다.’

이렇게 팔곡시의 주석을 남기고 있지만 고송은 남아있지 않다.

‘채약동(採藥洞)’이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데, 채약동 굽이를 신선이 사는 공간으로 비유하고 있다.

‘삼산이 어느 곳에 있는가(三山何處在)/ 요초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네(瑤草可延年)/ 신선을 나는 믿지 않으나(神仙吾不信)/ 달빛 받으며 호미 메고 돌아오네(帶月荷鋤旋)’

여기서 삼산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 산으로 방장산, 봉래산, 영주산을 말한다. 요초는 옥구슬같이 아름다운 풀로, 이것을 먹으면 장생불사한다고 한다. 신선 세계를 이야기하며 신선 같은 은자로서의 삶을 염원하고 있다.

‘구곡이라 고암에서 아득히 바라보니(九曲高菴望鬱然)/ 숲 끝의 폭포 물이 앞 내를 달려가네(林端懸瀑走前川)/ 당연히 이것은 깊고 깊은 동천으로 가니(應知此去深深洞)/ 삼십 동천 중 제일 동천이라네(三十天中第一天)’

9곡 고암(高菴)은 고산사(高山社)를 말한다. 정규양은 1707년 고밀곡(高密谷)에 고산사를 창건했다. 유생들이 왕래하며 공부하던 곳이었다. 이 고산사를 후손들은 고밀서당(高密書堂)이라 하고, 서당이 자리했던 굽이를 서당골이라 불렀다.

이 고산사는 채약동에서 자하봉 산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는 곳에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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