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청도 삼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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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6   |  발행일 2018-03-16 제36면   |  수정 2018-03-16
수명·영예·끼니, 세 가지가 족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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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대의 그늘진 북측 단애. 삼족대 지붕, 신도비 귀두, 육각 정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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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앞에서 삼족대를 본다. 문은 서쪽 협문으로 이전에는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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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대에서 한 단 내려서면 삼족당 신도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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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대 뒤뜰에 안담처럼 길게 누운 바위.

그늘진 북측 단애를 나무 계단이 사선으로 오른다. 눈길 닿는 곳마다 이를 악문 석축, 그러나 또각거리는 계단이 도리어 묵직하다. 머리 위에는 내려서는 흙돌담이 하늘을 금 긋고, 계단은 그 가까운 아래에서 급히 휘어 다시 사선으로 올라선다. 이제 직선의 짧은 담장 길, 길 끝은 벼랑이다. 걱정도 말고 당황도 말라는 듯 협문 하나가 쑥 잡아끈다. 휘청 문턱을 넘어 만나는 옛 정자의 옆모습. 그는 강을 향해 앉아 있다.

◆ 세 가지가 족하다, 삼족대

그는 16세기 조선의 선비 김대유(金大有)다. 청도 사람인 그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다. 탁영과 정암의 이름만으로도 그의 운명을 짐작할 만하다. 김일손이 1498년 무오년의 사화로 능지처참 당했을 때 19세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유배되어 8년 만에 풀려났다. 이후 그는 정시에 장원급제를 하고 관직에 오르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게 되고 그 또한 관직을 삭탈 된다.

고향 청도로 내려온 그는 매전면 금곡마을의 천변 단애 위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삼족대(三足臺)다. 이곳에서 그는 남명 조식, 소요당 박하담, 신재 주세붕, 율곡 이이 같은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후진을 길렀다. ‘삼족’은 ‘예기(禮記)’에 나온다. ‘물고기 잡을 수 있고, 땔감 충분하고, 양식 구할 밭이 있으니 세 가지가 족하다’는 말이다. 김대유는 이를 본따 ‘나이 육십을 넘었으니 수(壽)가 이미 족하고, 가문이 화를 입었으나 사마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냈으니 영예가 족하고, 아침과 저녁밥에 반찬이 끊이지 않으니 식(食) 또한 족하다’며 스스로 삼족당(三足堂)이라 했다.

관직 삭탈 당한후 고향 내려온 김대유
매전면 금곡마을 천변 정자 짓고 은거
담장의 동쪽 산·서쪽 강 잇는 일각문
대청에 율곡 이이 등이 쓴 편액 걸려

삼족대 감아돌아 밀양강 합류 동창천
절친과 기근 대비해 세운 창고 ‘동창’
정자 앞 담장아래 沼 ‘우연’옥색 물빛



삼족대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담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일각문을 세웠는데 동문은 산을 잇고 서문은 강을 잇는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오른쪽에 2칸 방을 두고 그 좌측과 전면에 ‘ㄱ’자 모양으로 마루를 놓았다. 마루는 뒷면과 측면에 판문을 달아 폐쇄성을 갖췄다. 대청에 면한 방문은 팔각 불발기문으로 삼족대 유일의 호사품이 아닌가 싶다. 정자 뒤뜰에 세로로 긴 바위가 안담처럼 누워있다. 바위에 이어 담도 세워 두었다. 고른 땅에 툭 튀어나온 바위가 저 혼자 멋쩍을까 싶어 부러 담을 세운 모양새다.

대청에 여러 편액이 걸려 있다. 헌금과 같은 기부 내역을 적은 것, 13세손인 김용희(金容禧)가 쓴 것을 포함한 3개의 중수기, 후손과 후학들이 쓴 시판들이다. 그 가운데 율곡 이이가 쓴 ‘삼족당서(三足堂序)’가 있다. 친절하게도 율곡의 시를 해석해 놓은 액자가 삼족대 편액 아래에 걸려 있다. 긴 시다.

‘(전략) 연무는 눌연에 걸리고/ 고기는 우연에 뛰논다./ 한가한 중이라도 형용을 묘사하기는 어렵고/ 노을은 봄이 저무는 산허리에 피어오른다./ 고요함 속의 다함이 없는 자태요/ 낙엽은 가을 밤 달이 삼경일 때 부서진다. (후략)’ 볼수록 눈이 맑아지는 글이다. 거듭 읽을수록 삼켜버리고 싶은 글이다.

◆ 동창천은 눌연과 우연을 잇는다

강은 동창천(東倉川)이다. 천은 경주 산내면에서 시작해 운문댐에 잠시 머물렀다가 동곡천과 관하천을 품에 안고 삼족대 아래를 흘러 밀양강과 하나 된다. 정자가 앉아 있는 대(臺)는 단호하게 동창천으로 뛰어드는데, 김대유는 그 아래 소(沼)를 ‘우연(愚淵)’이라 이름했다. 천을 거슬러 오르면 ‘눌연(訥淵)’이 있다. 김대유의 벗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이 자신의 정자 아래 연못을 부르던 이름이다. 김대유는 이렇게 썼다. ‘어눌한 못(訥淵)이 어리석은 못(愚淵)에 다다른다/ 옛 성인도 어리석은 듯 어눌하려 했다 하네/ 낚시하며 이곳을 내왕하길 십년/ 이젠 인간사에 어리석고 언사도 어눌해졌네.’ 삼족대의 ‘우연’은 소요당의 ‘눌연’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율곡의 노래에서 아주아주 조금의 질투가 느껴진다.

둘은 의와 뜻이 같았고 우정은 매우 깊었다 한다. 1520년 김대유와 박하담은 의기투합해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았다. 고향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뭄과 기근이 들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때 세운 창고가 동창(東倉)이다. 청도관아의 동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이다. 그때부터 창고가 있는 마을은 동창마을, 동네를 감아 흐르는 강은 동창천이 되었다. 그 마을이 지금의 매전면 소재지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 갈 때 ‘동창에 간다’고 한단다. 두 사람은 지금 눌연이 있는 신지리 선암서원에 나란히 배향되어 있다.

◆ 우연의 언덕에서

정자 앞 낮은 담장 아래로 우연을 내려다본다. 수심은 알 수 없고 옥색 물빛은 담담하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담이 툭툭 내려앉다가 돌아서는 모습이 보인다.

서문을 나와 한 단 내려서면 1973년에 세운 삼족당의 신도비가 서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방과 부엌, 방앗간을 갖춘 관리사가 있었다고 한다. 신도비의 커다란 귀부(龜趺)가 서쪽 벼랑을 향해 있다. 담장 가운데가 열려 있으니 거북은 월담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열린 담장 아래로 좁디좁은 계단이 축대를 꽉 붙잡고 내려간다. 그 아래에 청도군에서 지은 6각 정자가 자리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자의 콘크리트 축대와 언덕의 바위가 한 몸이 되어 우연으로 뛰어든다.

율곡은 삼족대의 주인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인 선생은/ 서리 소나무의 정결과 절조요/ 물에 비친 달이요 빈 옷섶이다.’ 삼족당보다 22세나 어렸던 남명은 그의 묘갈명에 ‘세상을 덮을 영웅’이라 했다. 삼족당 선생에 대해 세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율곡과 남명의 글을 통해 멋대로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면서, 조금 어리석게, 조금 어눌하게,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생이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닐 것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부산 고속도로 청도IC로 나간다. 청도·대구 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가다 청도읍에서 운문·경주 방향 20번 도로를 타고 간다. 매전면소재지 지나 조금 가면 오른쪽에 매전교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삼족대 이정표가 서 있다. 길에서 삼족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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