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항일·민주운동 ‘대구인’ 동상을 세우자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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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5   |  발행일 2018-03-15 제31면   |  수정 2018-03-15
[영남타워] 항일·민주운동 ‘대구인’ 동상을 세우자
변종현 사회부장

그의 얼굴과 다리, 옷자락은 ‘직유(直喩)’다. 1909년 을사늑약과 식민정책의 주범(主犯)을 저격하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야생마처럼 역동적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손은 ‘은유(隱喩)’다. 코트 안으로 집어넣은, 보이지 않는 손이 꺼내려 한 것은 한 자루 권총인 동시에 31세 청년이 3년간 풍찬노숙하면서 가슴에 품었던 한국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라는 꿈이다. 지난해 중국에서 기증해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역 광장에 설치된 안중근 동상을 보고 있으면 비유와 상징이 비단 시(詩)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놀라운 표현력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감탄과 동시에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여태 이런 시적(詩的)인 동상을 본 적 없다. 높이 2.5m의 이 청동 동상을 만든 중국인 작가가 부럽고, 이런 동상을 설치할 수 있었던 의정부시가 부럽다. 그래서 이런 동상을 무시로 볼 수 있는 의정부시민이 참으로 더욱 부럽다. 북악산 아래, 청와대 아래, 그리고 경복궁 아래에서 버티듯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늘 볼 수 있는 서울시민처럼 말이다. 광장다운 광장이 있고 동상다운 동상이 있는 도시는 마냥 부럽다. 도시의 정신이 느껴져서다.

대구에 때아닌 동상 타령이다. 6·13지방선거 예비후보 중 한 명이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 건립을 제안하고 나서다. 실제 보수진영에선 추진 발대식까지 개최했다. 한 도시가 상징적 장소에 특정한 인물의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단지 조각물 하나 설치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도시의 정신과 역사가 세워지는 것이며, 그래서 미래세대의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외지인의 이 도시에 대한 이미지까지 규정한다. 동상 설치에 전 시민적, 전 시대적 공감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박정희 동상은 대구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건가.

박정희 동상이 세워지려면 산업화세력(보수)과 민주화세력(진보) 간 ‘역사 빅딜’이 전제돼야 한다. 역사를 보는 상반된 관점이 엄연히, 그리고 팽팽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4·19 이전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보수의 양보가, 4·19 이후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진보의 양보가 필요하다. 친일·부일세력에 대한 엄중한 단죄를 전제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서로 인정해 줄 때, 그 바탕 위에서 박정희 동상 건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또 여기에는 대척점에 있는 대구 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동상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 대구정신은 현재 정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장성이 중요하다. 개발독재시대 가장 치열한 노동투쟁을 펼친 대구 출신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대구정신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전태일 없는 박정희 동상은 실현되기 힘들다.

지난 2월21일부터 28일까지 열린 대구시민주간은 대구정신 확립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자는 뜻이 모였다. 1907년 2월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주지하다시피 주권수호운동이자 항일운동의 시작점이다. 또 1960년 2·2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다. 대구가 항일운동과 민주운동의 출발점이 됐다는 것은 대구의 자랑스러운 정신적 자산이다. 특히 보수의 아이콘, 보수의 성지로 굳어진 대구가 실은 민주운동의 시작점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쉽게도 대구는 그동안 자랑스러운 정신 자산을 상징화하고 표출하는 작업에 소홀히 해왔다. 물론 기념탑과 조형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화문 이순신이나 의정부역 안중근 같은 ‘상징적’ 동상은 없다. 그것은 기념공원 한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언제나 시민의 눈에 띌 수 있는 곳에 우뚝 서있어야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교통 문제를 꺼내겠지만 반월당 한가운데나 2·28공원~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사이에 항일·민주운동을 펼친 대구인(大邱人)의 동상 제작을 고민할 때가 됐다. ‘칼레의 시민’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대구정신의 시각화는 지금 당장 필요한 과제다. 대구 미래세대에 대구정신을 확립해 보여주는 것은 우리시대의 의무다.변종현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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