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신문고와 국민청원

  • 김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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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3   |  발행일 2018-03-13 제30면   |  수정 2018-03-13
대의기관 불신에서 출발해
직접소통의 길 연 국민청원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무분별·무고한 청원 처벌 등
억울한 피해 방지대책 필요
20180313
김기억 동부지역본부장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백성(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한다. 겉으로는 국민과의 소통을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대의기관(조선조 조정이나 국회 등)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을 깔고 있다.

국민과 직접 소통을 위해 위정자들이 만든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 초 설치된 신문고(申聞鼓)와 문재인정부 들어 운영 중인 국민청원제도다. 이 둘은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출범 시점이다. 신문고는 태종 원년(1401)에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떠 백성의 억울함을 직접 해결해 주기 위해 대궐에 설치됐다. 백성과의 직접 소통을 앞세워 개국 초 혼란과 재상 등 신하가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왕권정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국민청원제도 문재인 정권 출범 3개월 만인 지난해 8월19일 등장했다. 현 정권 역시 대통령 탄핵을 통해 창출된 탓에 정권 초 정국 혼란을 극복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불통의 정치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받은 전 정권과의 차별화에도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단 청원이 있었고 신속하게 답을 내놓은 것도 닮았다. 태종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생원 50명, 조계사 승려 수백 명 등이 7건의 집단격고(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북을 침)를 했다. 이 가운데 3건만 요구가 받아들여졌지만, 가부에 대한 답은 의금부 관리가 왕에게 보고한 후 5일 안에 내놓아야 했다. 국민청원은 30일 동안 20만명 이상 추천한 청원에 대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가 답을 한다. 12일 현재까지 13만7천여건의 청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발탁 청원 등 14건의 청원에 대한 답변은 이루어졌고, 연극인 이윤택 성폭행 진상규명 청원 등 5건은 요건을 충족해 답변 대기 중이다.

신문고와 국민청원은 다른 점과 함께 역기능도 꽤 있다. 신문고는 이용 방법이 까다로웠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일단 관할 관청에 알리고, 그 관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야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다. 격고할 수 있는 내용도 제한된 데다 신문고는 한양 대궐에 설치돼 있고, 무고성 격고 때는 엄중한 처벌까지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신분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신문고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양에 사는 양반들이 주 이용자가 됐다. 당초 취지와는 달리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인 셈이다.

반면 국민청원은 인터넷을 하는 국민 누구나 청원 내용 제한 없이 이용이 가능하다. 신문고와 달리 무고성 청원에 대한 처벌 규정도 없고 익명으로도 참여할 수 있다. 이 탓에 국민청원 게시판 상당수는 주관적이고 집단 분노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일부 청원 내용은 마녀사냥에 가깝다. 그래도 청와대는 국민과의 약속을 이유로 답변 조건을 갖춘 청원에 대해 답을 하다 보니 일부 답변은 삼권분립을 위협하고, 여론 재판을 부추긴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최근 청와대는 김보름 선수 등 국가대표 자격박탈과 빙상연맹 적폐 청산 요구(61만여명이 청원 참여)에 대한 답변에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빙상연맹의 적폐청산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대표 자격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할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우리나라 국가대표는 뛰어난 실력은 물론이고 인성과 팀워크까지 갖춰야 하는 전능한 인간만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민청원이 낙인(烙印)이 되는 것도 문제다. 김보름 선수는 은메달을 따고도 웃지 못하고, 폐회식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다. 국민청원이 김 선수에게는 낙인이 된 셈이다. 김 선수는 지난해 추석에 이어 지난달 27일에도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대구 달성군 다사읍에 어려운 이웃돕기 성금 500만원을 맡겼다. 김 선수 어머니는 최근 다사읍 봉사단체에 가입해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국가대표에게 자격이 없고 인성이 부족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국민청원이 제대로 된 국민과의 소통 공간으로 자리 잡으려면 보완책이 필요하다. 무고한 청원에 대한 처벌 규정, 무분별한 청원(주관적 주장, 사적 분노 표출 등)을 막기 위한 명확한 청원 범위 설정, 중복 추천 방지책, 억울한 피해자 발생에 따른 대책 마련 등이 필요하다. 국민청원이 만사형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만인소통(萬人疏通)’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김기억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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