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아름다운 라이벌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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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08   |  발행일 2018-03-08 제31면   |  수정 2018-03-08
[영남타워] 아름다운 라이벌
이창호 경북부장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마라토너는 누구였을까. 손기정(1912~2002년)도, 서윤복(1923~2017년)도 아니다. 남승룡(1912~2001년)이었다. 그는 반도는 물론 열도에서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도 맨 먼저 피니시라인 테이프를 끊었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라이벌 손기정 목에 걸렸다. 남승룡은 기대에 못 미친 동메달. 올림픽 결과는 둘 운명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손기정은 조선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다. 남승룡은 하루아침에 2인자로 떨어졌다. 대중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잊혔다. 손기정은 그것이 내내 마음에 쓰였다. 귀국 뒤 자기만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남승룡은 친구의 영광을 결코 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손기정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에서만큼은 조금의 양보도 없었지만 그들은 둘도 없는 갑장(甲長) ‘절친’이었다. 하지만 남승룡도 평생 손기정을 부러워한 한 가지가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었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월계수였다. 자신은 동메달리스트여서 월계수를 받지 못했다. 스포츠가 감동을 주는 것은 이렇듯 ‘아름다운 라이벌’이 있어서다.

지난달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도 ‘아름다운 라이벌’이 있었기에 여운이 더 오래 간다.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다. 솔직히 고다이라에게 더 반했다. ‘배려의 정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세간에 회자된 그 ‘쉿!’ 장면. 이상화 바로 직전 조에서 달린 고다이라가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순간이었다. 기쁨의 포효는 생각조차 않은 듯, 차분한 표정으로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일본 관중에게 조용히 해달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자신을 향한 환호성이 자칫 이상화가 대기 중인 뒷 조에 방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인 개인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긴다고 한다. 스포츠 대결에서조차 진심어린 배려를 보여주니 놀라웠다. 그날 감동의 마지막 방점도 고다이라가 찍었다. 2위로 경기를 끝낸 뒤 진한 눈물을 쏟아내던 이상화를 감싸 안으며 위로와 존경을 나타냈다. 다소 뜬금없는 상상을 했다. 그날 2인자가 된 이상화가 새롭게 1인자가 된 고다이라에게 먼저 다가가 “이젠 네가 올림픽 챔피언이야”라고 축하를 건넸더라면…. 몇 곱절 더 아름다운 라이벌로 각인됐을 것이다.

‘원한의 라이벌’도 있었다. 1994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눈앞에 둔 때였다. 한 괴한이 올림픽 선발전을 앞둔 미국 여자피겨스케이팅 1인자 낸시 캐리건을 둔기로 내리친 사건이 벌어졌다. 엄청난 충격에 캐리건은 선발전 출전을 포기했다(미셸 콴의 양보로 결국 올림픽엔 출전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사건 전모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범인은 캐리건의 라이벌이자 2인자인 토냐 하딩의 경호원이었다. 하딩은 결국 영구제명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치도 스포츠와 별반 다르지 않다. 3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도 수많은 ‘라이벌 대결’이 펼쳐진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선다. ‘더티 플레이(Dirty Play)’가 난무할 게 뻔해서다. 가짜뉴스(Fake News) 등을 통한 비방·흑색 선전이다. ‘아니면 말고’다. 그럴싸하게 한 건 터트려 기선을 잡거나 판세를 뒤집으려는 기도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아마 벌써 도사리고 있을지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라이벌 흠집내기에 골몰하는 후보라면 그의 공약은 안 봐도 공염불이다. 오는 지방선거는 유권자들이 지역 일꾼을 직접 뽑기 시작한 지 27년째 되는 해다. 이번 선거에선 ‘원한의 라이벌’ 대신 ‘아름다운 라이벌’을 볼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 유권자부터 눈을 부릅떠야 한다. 정책·비전은 뒷전인 채 라이벌 약점 캐기에만 혈안인 후보에겐 단호히 경고장을 날려야 한다. 이창호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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