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밀양 석동 석골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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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3   |  발행일 2018-02-23 제36면   |  수정 2018-02-23
돌 천지 절집 마당에도 ‘자글자글’ 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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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문, 운문산(雲門山). 경북 청도와 경남 밀양의 경계에 서 있다. 큰 산은 큰 강처럼 여러 이름을 가졌는데, 청도에서는 범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라 하여 ‘호거산(虎踞山)’이라고도 하고, 밀양에서는 한 덩이의 바위 모양이라 하여 ‘한바위산’이라고도 불렀다. 또 산의 서쪽 돌의 골격을 가진 골짜기에서는 ‘석골산’이라고도 부르고, 그 골짜기 마을이 ‘석동’이라 ‘석동산’이라고도 한다. 자유로운 사람들 저마다의 호명들이지만 거의 언제나 그 순정한 구체성에 놀라게 된다.

돌 마을 ‘석동’
길게 이어진 담장그림 따뜻하게 반겨
뒷산 골짜기 기암괴석·석굴·돌밭 가득
마을 끝자락 밀양 첫 의병 봉기 기념비


석골사
한반도 지도 닮은 석골폭포 위 자리잡아
돌계곡·돌다리·돌계단·돌담 싸여 아담
세 칸 법당…산신각·칠성각 어깨 맞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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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마을. 원서천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고 담벼락에는 그림이 가득하다.

◆석동의 석골계곡

산내천을 가로지르는 석골교를 건넌다. 다리 왼쪽에 오토캠핑장이 있다. 한 사람이 몸을 누이면 족할 작은 텐트가 보인다. 문득 고독은 혼자 하는 야구 관람처럼 취미의 한 가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넌다. 천은 원서천, 캠핑장의 등을 지나 산내천으로 흘러들어간다. 물은 거의 말라 동전처럼 빛나고 검푸른 돌들과 서걱대는 갈대들이 고요히 햇살을 받고 있다.

천의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고 길게 이어지는 담벼락에는 꽃과 나무와 열매와 웃고 있는 농부가 파스텔 톤의 빛깔로 가득하다. ‘얼음골 사과’간판도 군데군데 보인다. 이제는 대한민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벽화지만 지금 인적 없는 산골의 담장그림은 할머니의 꽃바지처럼 따뜻하다. 이곳은 석동, 돌 마을이다. 마을 뒷산 골짜기에 기암괴석과 석굴, 돌밭이 가득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 따라 산 깊이 이어지는 계곡은 석골계곡이다. 집들이 뜸해지고 골짜기에 큼직한 바위들이 흔해지면 석동 또는 석골이라 호명했던 이들의 입김이 훅 덮쳐온다. 과연 돌 골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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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의 임진왜란 창의 유적 기념비. 석동은 밀양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곳이다.

마을의 끝자락 길가에 커다란 기념비가 서있다. 임진왜란 초인 1592년 4월, 밀양부사 박진이 작원관 전투에서 패한 후 후퇴해 장기전을 준비했던 곳이 석동이었다고 한다. 인근의 백성들이 피란했던 곳도 석동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한(漢) 손기양(孫起陽),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 진사(進士) 이경승(李慶承) 등이 밀양 최초로 창의했다. 관군과 의병은 함께 싸웠고 인근 용전리와 원서리 등에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최초의 전공을 올렸다고 한다.

기념비 옆 안내판에 산세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석골 계곡은 석골사 즈음에서 여러 골짜기로 갈라진다. 동쪽 골짜기에는 한여름에도 5℃ 정도의 냉기를 뿜는다는 제2 얼음굴과 상원암이 있단다. 북동쪽으로는 딱밭재 지나 운문사가 있고, 북쪽에는 형제굴이 있다. 이 외에도 10여개의 굴이 산재해 있다는데 그래서 군도 백성도 피신하기 좋았던 모양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운문산은 골이 깊숙하고, 불가에서는 천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것이며,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복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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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골사. 마당 가운데 주목나무를 중심으로 법당, 산신각, 칠성각, 선방, 요사채, 종각 등이 있는 아담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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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옆에 작은 대숲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다.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가 대단하다.

◆석골사

계곡은 내내 넓다. 길은 천천히 오르는데, 갑자기 골이 더 깊어지고 길이 더 급해진다. 그 길가에 두어 개 평상과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낙엽을 뒤집어쓰고 아슬아슬 앉아 있다.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니 높직한 벼랑에 물줄기가 꽝꽝 언 채로 매달려 있다. 석골폭포다. 폭포는 높이가 10여m, 소(沼)의 둘레가 50여m로, 물줄기가 한반도 지도를 꼭 닮았다는데 여름 장마철 뒤 쏟아지는 물줄기는 천지를 진동한다고 한다. 골짜기들은 여기서 갈라지고, 계곡의 물줄기는 여기서 하나 된다. 폭포 옆에 석등 2기가 산문을 연다. 오르막의 소실점에 절집이 보인다. 석골사(石骨寺)다.

주변은 돌 천지다. 돌 계곡, 돌다리, 돌계단, 돌담, 돌 수조. 절집 마당도 자글자글 소리를 내는 돌 마당이다. 아담하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많고 북 카페가 있다. 석골사는 신라 말 비허(備虛) 스님이 지은 암자로 추정된다. 오래된 절집이다. 한때는 석굴사(石窟寺)라고도 했는데 비허 스님이 석굴에서 수도하다 암자를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비허는 도반인 보양 선사와 함께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 덕에 석골사는 고려 때 9개의 말사를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절은 쇠퇴를 거듭했지만 임진왜란 때는 석동계곡으로 들어온 의병과 백성들을 품기도 했다. 의병으로 활약했던 손기양은 임란 후 관직에 나갔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그가 쓴 ‘석골사’라는 시가 있다. ‘(전략) 계곡의 물은 여러 바위에 걸려 골짜기에 울리고/ 달은 층층 봉우리에 솟구쳐 한 밤중에도 밝은데/ 산 밖의 길은 험하여 피곤한 다리를 걱정하고/ 베개 가엔 묘한 향냄새로 마음이 맑아지네./ 근자에 듣자 하니 강호에 풍랑이 많다는데/ 그 누가 노를 잡고 생사를 살펴볼까/(후략)’ 석골사는 광해군 연간까지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거의 사라진 것을 영조 때인 1753년에 함화당 의청 스님이 중창했고 그때 상원암도 함께 중수해 함화암이라 편액하고 참선하는 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석골사는 6·25전쟁 즈음에 빨치산의 소굴이 된다며 관공서에서 불태워 없앴다. 이후 1962년 신도들과 주민들의 헌금으로 법당을 지었고 차근차근 일어서 현재에 이른다.

세 칸 법당이 있고, 산신각과 칠성각이 어깨를 맞댄 두 칸 작은 건물이 있다. 선방과 요사채가 멀찍이 바라보며 자리하고, 마당 가운데에는 주목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주목나무 남쪽에 종각이 있는데 그 옆에 작은 대숲이 하늘 끝까지 솟아 날카롭고 광막한 바람을 일으킨다. 대숲의 바람소리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린다. 법당과 요사채 사이, 기와를 인 뒷문을 나가면 골짜기를 바라보고 앉은 해우소가 있다. 선비라면 멋있는 정자 하나 지어 음풍농월할 만한 자리다. 해우소에서 석골사 높은 석축 아랫길 따라 다시 산문을 나선다. 석동마을에 잠시 멈추어 ‘얼음골 사과’를 산다. 박스에 정성 들여 담아 주신다. “그냥 봉지에 담아 주셔도 돼요.” “안 돼요. 서로 부딪치면 멍들어. 멍들면 곪아.” 택리지는 옳았다. 순정한 농부가 천명의 성인이다.

☞ 여행정보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로 나가 오른쪽 24번 국도(밀양대로) 언양 방향으로 간다. 원서교차로에서 원서리로 빠져나가면 왼쪽 지하도 앞에 석동 표지석이 보인다. 석골교 건너 우회전한 후 석동마을 지나 산길을 조금 더 오르면 석골사가 있다. 석골폭포 옆에 약간의 주차공간이 있고 석골사 경내에도 주차장이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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