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우상과 맹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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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2   |  발행일 2018-02-22 제30면   |  수정 2018-02-22
안톤 체호프의 ‘바냐 외삼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냐
헌신 가치 없는 세레브랴코프
정치·문화적이든 사적이든
두 인물, 너이고 나일 수 있다
[여성칼럼] 우상과 맹목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연출평론가)

전 세계를 매료시킨 한국 문화의 물결은 K-pop에서 비롯되었다. 최근에는 K-drama, K-food, K-beauty, K-fashion, K-musical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한류’의 급속하고도 거침없는 약진은 매력과 재능을 갖춘 ‘아이돌 스타’들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 ‘아이돌’은 선망과 애정의 대상을 이르는 말이 되었고,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우상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는, 이른바 ‘덕질’의 세계에 기꺼이 빠진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던 우상의 이면을 발견하게 되면 그에게 바친 애정과 열정의 높이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입는다. 안톤 체호프의 명작 ‘바냐 외삼촌’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명문가의 자제인 주인공 보이니츠키(바냐 외삼촌)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문학을 전공하는 매부 세레브랴코프 교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보람으로 여긴다. 매부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죽은 누이의 딸 소냐와 함께 누이의 지참금인 시골 토지를 26년째 관리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퇴직 후 젊고 아름다운 후처 엘레나를 데리고 시골로 돌아온 매부가 이기적인 속물임을 알고는 허탈감과 회의에 빠진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삶이 헛되었다는 데서 오는 자기혐오다. 그 고뇌는 엘레나에 대한 사모의 정이 싹트면서부터 한층 심각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세레브랴코프는 영지를 팔고 도회로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반평생을 희생과 헌신으로 보낸 대가로 자신이 가꾸던 땅에서 쫓겨나게 된 바냐는 세레브랴코프를 권총으로 쏜다. 총알은 빗나가고 어설픈 화해 끝에 세레브랴코프 부부는 허겁지겁 떠나지만, 낡은 저택에서 바냐와 소냐는 다시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리라 다짐한다.

이 우습고도 슬픈 희비극 ‘바냐 외삼촌’에서 되새겨야 할 점은 바냐의 우상 세레브랴코프의 추하고 어리석은 민낯, 그리고 헌신할 가치가 없는 존재를 우상으로 삼아 젊음을 허비한 바냐의 맹목이다. 바냐와 세레브랴코프, 두 인물 모두 너이고 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기실 우상이나 우상화는 맹목 또는 선입견과 단짝이었다.

아이돌, 즉 ‘우상(偶像)’이라는 한자의 사전적 풀이는 금속·돌·나무 등으로 만들어 인간이 숭배하는 ‘상(像)’이다. 그리고 ‘상(像)’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에 그려지는 ‘사물의 형체’를 이른다. 우상이란 본질이 아닌 형체를 가리키는 것이니, 종교에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아이돌(idol)은 태생적으로 진리로의 접근을 방해하는 개념이다. 어원인 그리스어 에이돌론 (eidolon), 라틴어 이돌룸 (idolum)은 지각하고 인식하는 인간과 실재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개재하는 모습 또는 상(像)을 말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돌룸의 역할에 의문을 갖고, 이돌룸이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는 선입견에 불과하므로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아이돌은 인간과 대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선입견 또는 진리를 바라보는 눈을 가린 맹목을 동반하기 쉽다.

문화적으로 아이돌과 덕질은 스펙트럼이 넓다. 특정 가수, 배우, 기악연주자, 지휘자, 연출가, 극단, 교향악단, 제작사의 작품이나 공연에 대한 신뢰와 성원은 엄청나다. 이는 티켓 파워로 이어진다. 예술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키고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관객들은 최고의 감동을 주는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다. 이런 아름다운 선택에도 맹목은 숨어들기 쉽다.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추문. 예술로 얻게 된 권위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는 즐거움에 눈이 먼 그가 준 상처와 허탈감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습관처럼 맹목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바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꾸만 눈을 비빈다.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연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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