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대하듯 聾人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어”

  • 도성현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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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1   |  발행일 2018-02-21 제13면   |  수정 2018-02-21
은행 고객센터 근무 고정빈씨
퇴근 후에는 수어 통역사 공부
월드미스유니버시티 한국대회
참가땐 수어 노래 선보여 주목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보유
“고객 대하듯 聾人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어”
하루종일 상담에 시달리면서도 퇴근 후 수어를 배우러 다니는 8년차 은행 고객센터 상담사 고정빈씨.

“정성을 다해 모시는 상담사 고정빈입니다.”

8년째 은행 고객센터에서 상담사로 근무 중인 고정빈씨의 몸에 밴 한결같은 친절 멘트다. 고씨는 아침 체조시간 후 공지사항 전달을 받으면 오전 9시쯤부터 곧바로 상담을 시작한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지칠 법도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고씨는 “20대 친구들이 한창 취업 준비에 매달릴 때 연극활동·요가강사·모델활동·방송출연 등 다양한 경험을 쌓느라 취업 준비가 좀 늦었다.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고객센터 상담사 채용공고는 평소 재테크에 관심을 가진 제게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며 상담사를 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힘들 때도 많죠. 상담사는 감정노동자이면서 지식노동자인 것 같아요. 회사와 고객이 원하는 표정이나 몸짓·말투를 유지하고 필요한 감정만을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며 “게다가 고객들은 상담사가 무엇이든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문의를 하는데, 그 부분을 다 채워드리기가 쉽지 않다”고 애로를 토로하기도 했다.

감정노동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실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특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도록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을 뜻한다. 고씨는 “상담사는 고객들의 말 한마디에 감동도 받고 상처도 받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객들의 이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라며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드리려 노력하고 있다.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대해주셨으면 하는 게 저희들의 작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하루종일 상담에 지친 고씨지만 퇴근 후 찾는 곳이 있다. 바로 대구농아인협회다. 청각장애를 가진 농인(聾人)들이 사용하는 수어(手語)를 제대로 배워볼 요량으로 찾게 된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농인들이 사용하는 손짓말은 흔히 ‘수화’로 알려져 있지만 2016년 8월 시행된 한국수화언어법에서 ‘손으로 하는 언어’라는 의미를 담아 수어로 정의했다.

그의 수어 실력은 2010년 참가한 월드미스유니버시티 한국대회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합숙 첫날 장기자랑 시간에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노래를 수어로 했어요. 그 모습을 본 대회 관계자분이 본선 대회 오프닝은 항상 수어 무대로 시작하는데 직접 무대를 꾸며보라고 제안하셨죠. 77명의 후보자들에게 오프닝 노래 가사를 수어로 가르쳤는데, 그 때문인지 후보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우정상도 받게 됐다”며 은근히 수어 실력을 자랑했다.

고씨는 농인들이 모이는 장소에 자주 나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려 노력한다고 했다. 대구농아인협회에서 개최하는 장애인영화제는 자막이 없는 국내영화를 자막과 함께 상영하는 베배리어프리영화제로, 농인들의 초대를 받아 참석하고 있다.

농인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다는 그는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 더 많은 곳에서 쓸 수 있기를 소망한다. 농인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고민 상담까지 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그는 작년에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데 이어 올해 농인과 청인을 이어주는 수어 통역사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걱정도 있다. 수어를 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행인들의 불편한 시선이 그렇다. “우리가 영어로 말하는 외국인을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듯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도 자연스러운 우리의 이웃으로 대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고씨는 “수어를 하는 저를 보면서 다들 신기해하고 부러워하지만 쉽게 시작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해 수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 많은 분들이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영어나 중국어를 배우듯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수어에 도전해보면 어떨까요”라는 말로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글·사진=도성현 시민기자 superdo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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