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영웅 울지마 이상화!…빙속 女 500m 은메달

  • 명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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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9   |  발행일 2018-02-19 제15면   |  수정 2018-02-19
3연패 문턱 아쉬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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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속여제' 이상화가 18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에 그치자 아쉬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 코너 실수로 ‘삐끗’
3연패 문턱 아쉬운 마무리
벤쿠버 금메달로 1인자 등극
소치 2연패로 장기집권 이뤄
고다이라와 아름다운 경쟁
올림픽 무대 유종의 미 거둬

“마지막 코너에서 실수가 나온 것 같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빙속 여제’ 이상화가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 레이스를 은빛으로 장식했다. 이상화는 18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31명의 선수 중 둘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라이벌인 일본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 고다이라를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사실 여자 500m 패권은 몇 년 전부터 이상화에서 고다이라에게로 차츰차츰 넘어가고 있었다. 고다이라는 2016년부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15회 연속 우승 행진을 이어오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이상화가 마지막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올림픽 500m 레이스를 앞두고 세계적 베팅업체 비윈(Bwin)이 책정한 배당률에서도 고다이라는 1.35배, 이상화는 4배를 각각 받았다. 즉 1만원을 베팅했을 시 고다이라가 승리하면 1만3천500원을, 이상화가 승리한다면 4만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고다이라가 승리할 확률을 훨씬 높게 바라봤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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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의 굳은 살

전문가들의 전망대로 이상화는 은메달에 그쳤지만, 이미 세계 스피드스케이팅계의 전설이다. 이상화는 7세 때 스케이트 선수였던 오빠를 따라 처음 스케이트장에 갔다. 이후 스케이트에 재능을 보이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운동을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는 어린 딸의 열정을 이기지 못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쇼트트랙부터 시작했다. 쇼트트랙도 곧잘했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유년시절이 대체로 그렇듯 이상화도 초등학교 때부터 국내 1인자로 군림했다. 그는 초등 2학년 때부터 고학년들을 모두 이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초등 5학년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전환했다. 미래를 내다봤을 때, 이상화에게는 스피드스케이팅이 어울렸다. 종목을 바꾼 상태에서도 이상화는 폭풍 성장세를 보였다. 2004년 태극마크를 단 이상화는 2005년 세계종목별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며 국내를 넘어 세계 스피드스케이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때부터 국가대표가 된 이상화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국가대표를 놓지 않았다. 그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훈련강도가 센 국가대표 선수촌에서도 이를 악물고 버텨낸 이상화다. 고교 3학년 시절이었던 2006년에 토리노올림픽 출전으로 올림픽과 첫 인연을 맺게 됐다. 이상화는 당시 2차 레이스를 마치고 동메달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마지막 조 경기가 끝난 후 전광판 상에서 그의 이름이 두 계단 내려갔다. 5위에 그친 이상화에게 스피드스케이팅계는 ‘역시 아시아인은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안돼’라는 얘기가 쏟아졌다. 실제로, 당시까지만해도 네덜란드 등 유럽권 국가가 압도적으로 많은 메달을 따냈던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아시아 여자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사례는 없었다. 중국, 일본 선수들이 은메달, 동메달까지는 따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상화의 주종목인 스피드스케이팅 500m는 육상종목으로 따지면 100m 달리기와 비교할 수 있다. 육상 단거리에서 흑인들이 득세하고 있는 것 처럼,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도 신체조건이 좋고 스케이트에 익숙한 유럽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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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올림픽에서 너무나 아쉽게 메달을 놓친 만큼, 이상화는 이때부터 승부욕에 불타 스케이트화 끈을 더욱 야무지게 동여맸다. 이상화는 8㎞ 산악 코스를 사이클로 달리고 170㎏ 바벨을 드는 등 피나는 노력을 통해 몸을 다부지게 만들었다. 절치부심한 이상화는 2009년 2월 하얼빈동계유니버시아드 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진 월드컵에서 잇따라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도 이상화는 사실상 ‘다크호스’ 수준이었다. 이상화가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 본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당시 금메달 유력주자였던 독일의 예니 볼프의 최고기록보다 이상화는 0.24초나 뒤져 있었다.

이상화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했고 결국 금메달을 차지했다. 합계 76초09(1차 38초, 2차 37초85)로 당시 세계기록 보유자이자 세계랭킹 1위에 올라있던 예니 볼프를 제치고 올림픽 챔피언에 올랐다. 이상화는 올림픽 첫 금메달에 만족하지 않았고 “반짝 금메달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더욱 꾸준히 훈련하겠다”는 말을 뱉으며, 4년 후 2014 소치올림픽을 바라봤다. 그리고 4년동안 이상화는 세계 스피드스케이팅계를 평정했고, 4년전 얻은 ‘다크호스’라는 별칭을 ‘독재자’로 갈아 치웠다. 이상화는 소치올림픽 여자 500m에서도 1·2차 합계, 74초70의 기록으로 압도적인 레이스를 펼치며 2연패에 성공했다. 12년만의 올림픽 신기록이자, 세계 여자 500m 역사상 세번째 2연패의 대업적이었다. 아시아 남녀 선수 통틀어서는 최초의 2연패 기록이기도 했다. 이상화가 전설의 반열에 오른 순간이다.

2연패 성공 이후 이상화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에게는 ‘얼짱 스케이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 방송 출연과 광고 섭외도 많았다. 하지만 이상화는 최대한 자제했다. 이상화가 이같이 조심하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이상화가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었을 당시 그의 오빠도 함께 스케이트를 탔지만 워낙 돈도 많이 들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종목이라서 부모님들이 부담스러워 했다. 결국 오빠가 그만두고, 아버지는 이상화만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상화로서는 자신을 위해 운동을 그만둔 오빠,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을 위해 더욱 치열하게 달려야했던 셈이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이상화는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 레이스를 마쳤다.

명민준기자 minj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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