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현대판 고려장?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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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5   |  발행일 2018-02-15 제27면   |  수정 2018-02-15

일반인이 잘못 알려진 역사 상식이 적지 않다. 고려장(高麗葬)도 그중 하나다. 고려시대에 늙은 부모를 산에 내다버리는 풍습 따윈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고려는 효를 아주 중요시했기에 부모상만 소홀히 해도 엄벌에 처했다. 고려사에는 부모가 죽었는데 잡된 놀이를 하면 징역 1년, 상이 끝나기 전 상복을 벗으면 징역 3년, 초상을 치르지 않는 자는 귀양을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부모상에 대한 법이 이 정도인데 살아 있는 부모를 산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얼토당토않은 고려장 이야기가 사실로 둔갑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조선동화집’을 펴내면서 나이든 노인을 버리는 중국의 ‘기로설화’를 마치 우리 민족의 설화인 것처럼 꾸며 넣었다. 이게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풍습으로까지 왜곡됐고, 더구나 광복 후에도 일제 식민지 교육을 청산 못하는 바람에 고려장이 교과서에까지 실리기도 했다. 만약 고려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왜구(일제)의 농간에 의해 졸지에 후손들에게 불효자로 낙인찍혔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하지만 아무리 잘못된 상식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굳어진 것은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 법. 요즘도 ‘현대판 고려장’이란 말이 무분별하게 쓰인다. 특히 언론이 문제다. 부모를 유기·학대하는 등의 ‘불효 사건’이 벌어지거나 노인에 대한 불경과 폄훼 논란이 불거지기만 하면 이 용어를 끌어다 쓴다. 거의 자동적이다. 정치권은 한 술 더 뜬다.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 조치까지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우기는 정치인들이 있을 정도다.

최근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延命)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존엄사법’ ‘웰다잉법’ 등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국민의 90%가 지지하는 이 법에 대해서도 일각에선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한다. 생명 윤리에 어긋나고 불효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식도, 회생 가능성도 전혀 없는 부모를 산소마스크만 씌운 채 고통 속에 마냥 방치하는 게 참된 효도일 수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고려에도 없었던 고려장을 들먹이며 사실을 호도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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