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1등만 기억하는 세상

  • 백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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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2   |  발행일 2018-02-12 제31면   |  수정 2018-02-12

10년 전 공중파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에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극중에서 취객으로 출연한 개그맨 주인공이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파출소 경찰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나한테 도대체 해준 게 뭐냐”면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소리쳤다. 다른 쪽에서는 술로 만신창이가 된 개그우먼 주인공도 비슷한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개그맨과 개그우먼의 캐릭터는 모두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서민 약자였다.

극중 파출소에서는 잠시 경찰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개그맨이 개그우먼에게 작업을 걸어보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경제력이 부족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이 이유였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회에 환멸을 느낀 개그맨은 세상을 향해 다시 고래고래 소리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당시 개그맨이 외쳤던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어 전국적인 유행어가 됐다. 아무리 잘해도 최고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정확하게 꼬집었던 것이다. 대학입시와 취업, 출세를 위한 숨막히는 무한 경쟁시대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외침은 국민 모두에게 희열의 위로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요즘 입시철에 고교 정문을 지나다 보면 ‘서울대 ○명 합격’ 또는 ‘의대에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이 자주 눈에 띈다. 최고의 노력과 실력을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서울대와 의대 합격’이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고교 간 순위를 매기고 교사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까 걱정이 앞선다.

지난해 서울대 합격자를 한 명 이상 배출한 일반고는 706개교로 전국 1천686개 일반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통계가 있다. 서울대에 많이 합격시킨 일반고는 서울의 교육특구 고교와 지역의 명문고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울대 합격률이 높은 일반고의 상위 10개교 중 5개교가 서울 8학군에 몰려 있을 정도다.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다’는 새로운 속담을 증명시킨 셈이다. 일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꼴찌도 있고 그 꼴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백종현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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