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염력’ 연상호 감독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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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9   |  발행일 2018-02-09 제43면   |  수정 2018-02-09
“‘부산행’넘어선다는 생각 안해…B급 코미디물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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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은 초능력이라는 클리셰를 빌려왔지만 여느 슈퍼 히어로물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좀비 소재로 한국식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열었던 ‘부산행’과 달리 ‘염력’은 연상호 감독의 이전 애니메이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어둠을 스케치한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같은 그의 이전 흔적들과 마주한 적이 없는 관객이라면 그 점에서 다소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직설화법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염력’은 초능력을 갖게 된 소시민 석헌(류승룡)이 위기에 처한 딸 루미(심은경)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다룬 판타지 영화다. 초능력과 코미디의 이종교배를 통해 낯설면서도 보편타당한 재미를 안기겠다는 의도로 출발했다. 얼핏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지지만 연상호 감독은 극 중 악의 축을 상징하는 홍상무(정유미)의 대사 “진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말로 영화의 방향성과 기획의도를 분명히 제시한다. 이를 위해 2009년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의 아픈 기억까지 소환했다. 역시 연상호답다. “‘부산행’이 성공을 거뒀으니 차기작에선 시도하기 힘든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는 연상호 ’감독은 그렇게 연상호이기에 가능했던 또 한 편의 인상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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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염력’의 한장면

▶모두의 기대와 관심 속에 개봉을 했다. 지금 심정은 어떤가.

“‘부산행’ 때와 비교하면 덤덤한 편이다.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도 있고. 사실 ‘염력’은 별 부담감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부산행’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말 스코어를 보니 ‘염력’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 같다. ‘부산행’이 장르적 완성도를 보여준 만큼 초능력을 소재로 한 ‘염력’ 역시 관객의 기대치가 있을 텐데 막상 영화를 보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블에 비견될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등장을 기대했던 관객들이라면 말이다. 그 점에서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시키지 않은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선택의 문제였다. 평범했던 한 중년 남자가 우연찮게 초능력을 갖게 된다는 소재를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투자와 제작사 관계자들도 ‘괜찮을 것 같다’며 공감을 표했다. 다만, 철거민 문제를 부담스러워했고, 좀 더 장르적이길 원해서 시나리오 버전을 한번 바꿔본 적은 있다. 하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애초부터 나는 B급 코미디를 만들고 싶었다. 결국 투자사와 제작사가 내 의견을 받아들였고, 지금의 결과물로 완성됐다.”


“평범한 중년 남자가 우연히 얻은
초능력 이야기 오래전부터 구상
슈퍼 히어로물 패턴 따르지 않아
낯설면서 보편 타당한 재미 중점”

“정유미가 연기한 ‘홍상무’캐릭터
구김살 없는 신선한 악당役 완성”

“애니메이션 제작해 수익 난다면
실사영화는 만들지 않았을 수도”



▶아쉬운 점이 없었다는 얘긴가.

“없었다.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고 완성본도 만족한다. 내 필모에 이런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배부르고 좋을 뿐이다.”

▶주인공 석헌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상처 하나 없는 초인인데 반해 악역 캐릭터들은 다소 희화화됐고 약하다는 느낌이다. 이 부분만이라도 좀 더 장르적으로 접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염력’은 매끈한 장르영화보다는 우화에 가깝다. 중간에 기존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처럼 석헌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악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둘이 싸우게 만드는 장르적 접근을 생각해본 적은 있다.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면 대중이 기대하는 영화에 가까웠겠지.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주인공의 대척점에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초능력을 아우를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존재였으면 했다. 그건 물리적 힘이 아닌 시스템인데, 초점을 그것과 싸우는 초인적 능력을 지닌 소시민에 맞췄다. 아무리 초인적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그 역시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다. 그만큼 시스템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다.”

▶‘염력’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홍상무 캐릭터다. 이를 연기한 정유미 배우의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참고한 게 있나.

“그럴 필요 없이 정유미배우가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스스로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장점은 어떤 역할을 맡아도 언제나 다른 느낌을 부여한다는 거다. 굳이 캐릭터를 재해석하거나 연기 변신을 하는 등 힘을 주는 연기와는 또 다르다. 덕분에 악역이지만 해맑고 구김살 없는 신선한 악당 캐릭터가 완성됐다.”

▶‘부산행’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뭔가.

“영화적으로 많은 제안이 들어왔다. 모두가 ‘부산행’의 성공을 보고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흥행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 점에서 ‘부산행’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운도 실력이라고 하지만 내가 그 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운을 바라면서 일을 하거나 부담감을 갖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산행’에 이어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그만큼의 영화적 책임과 의무가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연상호가 이번엔 초능력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요리할지 기대하고 있는 관객을 생각한다면 앞서 언급했던 장르적 접근을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부산행’을 했는데 또 비슷한 형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영화적 책임감과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책임감과 부담감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다만 투자사와 제작사도 내 의도에 공감하고 오케이를 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방향성만 유지하면 됐다. 만약 내가 ‘신과 함께’를 만든 김용화 감독처럼 회사의 대표였다면 나도 장르적으로 접근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개인이다. 개인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 선택을 하고,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부담감 없이 일을 해나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연상호스럽다’라는 말이 있다. 사회 비판적인 소재를 에두르지 않고 정공법으로 밀고 나가는 당신의 뚝심과 작가주의를 표현한 말인데 이제 수식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100억원대 상업영화를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외연을 갖춘 감독으로 말이다. 스스로 ‘연상호스럽다’를 정의한다면.

“‘염력’이 개봉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다. 일단 나만의 색깔로 작업을 했다고 생각한 게 ‘돼지의 왕’ ‘사이비’다. 아마도 ‘연상호스럽다’는 말은 그때 만들어진 수식이었을 거다. 이후 ‘서울역’을 하면서 작가주의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고, 상업적 코드를 도입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부산행’이다. 그렇게 매 작품 의도와 방향성이 정해지면 출발하게 되는데 ‘염력’을 하면서는 내가 나 자신을 규정짓는 것보다, 내가 이미 누군가로부터 규정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이다.”

▶독립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이다. 만약 많은 제작비가 확보된 애니메이션 연출 제의가 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나.

“‘염력’이나 픽사의 ‘인크레더블’ 같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독립애니메이션 작업을 오랫동안 하면서 이 산업의 시장논리를 잘 아는 편이다. 해외의 경우를 보더라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제작비를 투자받는 건 사실상 어렵다. 몇 달 전 ‘공각기동대’를 연출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을 만나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분조차도 제작비 마련이 녹록지 않은 듯했다. 생각보다 애니메이션 시장이 어렵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나마 되는 건 ‘도라에몽’이나 ‘명탐정 코난’ 같은 캐릭터의 힘으로 지탱하는 프랜차이즈 애니메이션들뿐이다. 픽사의 ‘겨울왕국’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그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디즈니라는 거대 퍼블리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사영화 감독으로 포지션을 바꾼 건 그런 이유인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뭔가를 해보기엔 제약이 너무 많다. 나는 독립애니메이션을 표방해왔고 그 결과물인 ‘돼지의 왕’ ‘사이비’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봤다. ‘돼지의 왕’이 1억2천만원, ‘사이비’가 3억8천만원, ‘서울역’이 6억원 정도 제작비가 들어갔다. 퀄리티를 높이고 스태프의 인건비가 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산이 늘어났다. 문제는 늘어난 예산만큼 관객이 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한두 번이지 계속 까먹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만드는 사람도 지친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수익이 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 있었다면 실사영화는 하지 않았을 거다.”

▶‘부산행’에 이어 ‘염력’ 역시 CG가 필수적인 SF장르다. 실사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

“내가 실사작업을 하면서 놀랐던 건 굉장히 분업화가 잘 돼 있다는 점이다. 각 파트가 이미 프로페셔널화 돼 있어서 사실 감독이 특별히 할 게 없었다. 작품에 대한 방향성과 감각 정도만 가지고 작품에 임했던 것 같다.”

▶차기작은 뭔가.

“영화는 항상 준비하고 있다. 시나리오도 몇 개 있는데 장르도 의미도 다 다르다. 제일 좋은 건 연상호의 실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상호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찾아서 해보는 거다. 차기작은 모든 것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는 ‘총합’ 같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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