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퐁텐블로와 바르비종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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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9   |  발행일 2018-02-09 제37면   |  수정 2018-06-15
나폴레옹의 궁전이자 유배지 떠나던 이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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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 궁전 정원에서 바라본 퐁텐블로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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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텐블로 궁전 입구의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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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비종 중심가. 거리에 아틀리에와 갤러리가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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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 배경이 된 퐁텐블로 들판. ‘이삭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들’ 같은 밀레의 대표작은 모두 이 들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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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밀레의 집.

파리 여행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뺄 수는 없다. 대학 시절 집사람이 한동안 푹 빠졌다는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때문이라도 가야 했다. 워낙 관광객이 많다고 소문이 난 터라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섰다. 그러나 개관 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줄이 꼼짝을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파업 중이어서 언제 개관할지 모른단다. 그리고는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씩 웃는다. 이런 황당한 일이.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부분의 관광객은 군소리 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항의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익 앞에 관광객도 같은 노동자로서의 동병상련일까? 이러다 또 금방 파업이 풀리니 기다려보란다. 30분을 더 기다렸다. 이곳에 도착한지 두 시간 가까이 흘렀고, 시간도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냈다. 애꿎게 주차비만 날리고,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인근의 퐁텐블로 궁전으로 차를 몰았다. 퐁텐블로 궁전은 명성이나 관광객 등 어느 모로 보나 베르사유 궁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애초에 꼭 가보고 싶었던 화가의 마을 바르비종과 붙어있으므로 나는 쉽게 베르사유를 포기할 수 있었다.


퐁텐블로 궁전
베르사유에서 85㎞ 떨어진 곳 위치
1500개 방…역대 왕들 생활 변천史
마리 앙투아네트 피서지 방도 유명
세계역사·인간의 욕망이 뒤엉킨 곳

바르비종
퐁텐블로서 10㎞거리 화가들의 마을
1830년대 밀레·루소 등 80여명 터전
회화사 족적 남긴 ‘바르비종파’산실
모네·고흐 인상파 화가들까지 몰려


퐁텐블로 궁전이 있는 퐁텐블로(Fontainebleau)는 2만여명의 인구를 가진 파리 인근의 숲속 도시다. 파리에서 65㎞, 그리고 베르사유에서 85㎞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 궁전은 800여년에 걸쳐 증개축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1천50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 건축물은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붕의 면적만 5에이커에 달하며, 12세기부터 왕실의 수렵지였던 야외 사냥터와 정원까지 합하면 총 230에이커가 넘는다. 프랑수아 1세 당시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과 정원을 중심으로 루이 13세에서 루이 16세 시대에 이르는 부르봉 왕조의 건축이 더해졌다. 그 안에 전시된 왕가의 가구나 장식품은 역대 왕들의 생활 변천사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특히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을 전시한 ‘프랑수아 1세의 갤러리’가 유명하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나리자’도 원래 이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온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왕에게 그림을 판 것이다. 이곳에는 또 부르봉 왕조 시대의 방이 많이 남아 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피서지로 자주 찾았다는 방과 살롱은 관광객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 중의 하나다. 이곳의 정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루이 14세가 성 둘레로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고, 앙리 4세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들면서 지금의 정원 골격이 완성되었다. 그 후 여러 왕들의 개성에 따라 다듬어져 지금은 정형의 프랑스식과 풍경 중심의 영국식이 혼재된 모습이다. 도로에서 황금색의 문을 들어서면 ‘백마의 광장’이 나타난다. 인상적인 말발굽형 계단은 이 성이 수렵을 위한 것이었음을 상징하고 있으며, 백마의 광장이라는 이름도 그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되면서 근위병들과 눈물을 흘리며 이별한 ‘이별의 광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니 궁전 하나에 세계의 역사가 담겨있고, 인간의 욕망이 엉켜있다. 왕족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되어 온갖 사치와 부귀영화를 누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피서지이기도 하고, 평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던 나폴레옹의 궁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 혁명 덕분에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도 외딴 섬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쳤으니 권력도 부귀영화도 그저 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쫓아다니는 부나비 같은 인간의 욕망은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다른 이름으로 포장했거나 나만 모르는 나의 욕망은? 아,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보다보면 자꾸 나를 반성하게 된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그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궁전이 그랬으며,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도 그랬다. 베르사유 궁전을 못 본 것이 차라리 다행스럽다.

그래도 오후의 목적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풀린다. 퐁텐블로 궁전을 나와 북서쪽 숲길을 따라 약 10㎞쯤 가니 작은 시골 마을 바르비종(Barbizon)이 나타났다. 인구 1천400여명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의 마을’로 불린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마을이 특별한 것은 프랑스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바르비종파’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화라는 그림을 처음 접한 것도 바르비종파의 대부인 밀레의 그림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입문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백하자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아주 어릴 적 기억이다. 시골집 대청마루에 걸려있던 그림이 그의 ‘이삭줍기’였다. 그것이 유명 화가의 유화라는 사실은 중학교 입학 뒤에 알았지만 화폭 속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낯선 생김새의 그 여인들은 이국인에 대한 나의 경계를 일찍부터 무너트린 예술적 완충재였다. 가끔씩 들렀던 면소재지 이발소에도 그의 ‘만종’이 푸시킨의 ‘삶’이라는 시와 함께 걸려 있었으니, 나는 글을 알기 전부터 이런 유럽의 예술가들을 보아왔던 셈이다. 기술의 발달로 복제 그림이 등장하면서 100년도 넘은 밀레의 그림이 그 외진 시골에까지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르비종을 찾아가는 것은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집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을은 소박하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중심가를 따라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었는데도 30분도 채 되지 않아 마을의 끝이 나타났다. 이 작은 마을에 1830년경부터 1860년경까지 밀레를 비롯하여 코로, 루소 등 80명 이상의 화가들이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물론 당시 파리에서 급속도로 번지던 콜레라를 피해 이주한 것이었지만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퐁텐블로 숲과 한적한 전원 풍경도 화가들을 끌어들인 중요 요인이었던 같다. 그때를 생각하며 다시 찬찬히 마을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살았던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이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거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한적한 농촌과 전원 풍경을 담았는데, 화폭 속에 담긴 사람들은 또 조금 전 퐁텐블로 궁전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무거우면서도 차분하다. 이삭을 주울 수밖에 없는 일상적 삶의 무게가 만종 속에 올리는 기도로 가벼워지면서 편안하고 따뜻하다. 삶의 가치나 질량을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궁전 속의 삶을 이보다 값지게 평가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심가에는 ‘밀레 기념관’ ‘바르비종파 미술관’ 등도 있다. 밀레 기념관은 실제 밀레의 주거지 겸 아틀리에였던 작은 2층집으로,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두 그림도 모두 여기에서 그렸다고 한다. 기념관 안에는 밀레의 유품과 동료의 작품, 모델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밀레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또 루소의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루소의 집도 있다. 루소와 밀레는 이 마을의 이름을 딴 바르비종 미술학교를 이끌기도 했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

바르비종파 미술관은 원래 바르비종파 화가의 아지트였던 ‘간느 여인숙’이었다. 특히 ‘바르비종의 일곱 별’로 불리는 밀레, 루소, 코로, 뒤프레, 디아즈, 트루아용, 도비니 등이 주축 멤버였으며, 여기에 쿠르베, 유에 등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매일 아침 그림도구를 챙겨 가까운 퐁텐블로 숲에서 스케치를 하고, 밤이면 열정적으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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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비종의 이러한 예술적 열기는 르누아르, 모네, 고흐 등 인상파 화가까지 끌어들였다. 특히 고흐는 밀레가 농촌생활의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며, 밀레를 닮고 싶은 ‘마음의 스승’으로 여겼다. 상시에가 쓴 밀레 전기를 탐독한 고흐는 ‘성지를 산책한 경험’이라고 토로하며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모사했다고 한다. 밀레의 ‘낮잠’(1866)을 모사한 그의 ‘낮잠’(1889~1890)은 느낌은 다르지만 밀레의 정신이 확연히 드러난다. 고흐가 마지막 일생을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도비니 집을 이상향으로 그린 것도 이곳에서 활동한 도비니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상파 화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니, 이 작은 마을을 회화의 성지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바르비종의 욕망은 퐁텐블로 궁전의 욕망과 무엇이 다를까? 극명히 달라 보이는 오전과 오후의 두 욕망이 사실은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근원의 힘일 수 있겠다. 그 욕망의 방향이 다를 뿐. 그래서 나는 다시 욕망하기로 한다. 그 욕망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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