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내가 먼저, Me First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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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8   |  발행일 2018-02-08 제31면   |  수정 2018-02-08
[영남타워] 내가 먼저, Me First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우리 여고 교실에서는 학교 담장 밖 골목길이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점심을 먹은 뒤 이어지는 수업. 눈꺼풀이 내려앉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해질 즈음이면 ‘그’가 등장했다. 인적 드문 오후,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에서 그는 바바리를 활짝 열어 제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대낮의 ‘바바리맨’이었지만, 우리는 늘 처음 본 듯 꺄악 꺄약 비명을 질렀고 선생님은 창문을 열고 잘 들리지도 않을 욕을 퍼부어대곤 했다. 잠은 달아났으나 공부가 될 리 없는 시간이었다.

바바리맨이 출현하는 날이면 우리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각자의 바바리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우리끼리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인 셈이었다.

만원버스에서 몸을 부비부비하는 중년 아저씨, 지나가며 가슴을 슬쩍 만지곤 모른 척하는 오빠 친구, 브래지어끈을 당겼다 놓았다하는 이상한 벌을 주는 선생님, 계산은 않고 내 가슴만 쳐다보는 슈퍼 아저씨. 바바리를 입지 않은 바바리맨이 세상엔 너무도 많았다. “야, 우리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도 수컷으로 태어나자” 우리의 이야기는 이런 다짐으로 끝을 맺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어두운 밤 골목길에서 만나는 ‘사람 남자’가 세상 어느 귀신보다 무섭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다음 생은 아직 멀었고, 그사이 태어난 두 딸의 몫까지, 나의 걱정과 불안만 늘었을 뿐이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고위 간부 성폭력 폭로 이후 국회의원, 대학교수, PD, 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슷한 피해 사례가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이쯤되면 어떤 대단한 여성이 미투 운동에 나선다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성폭력이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일상화된 일이다.

정작 놀라운 일은 미투 운동에 대해 보여주는 이 사회의 수준이다. 인터넷 댓글이야 원래 그렇다고 치더라도, 주변의 멀쩡(하게 보이는)한 남자들의 반응은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8년 전 일을 이제 와서 폭로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정치를 하려는 것 아니겠느냐” “얼굴을 보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인 분석이나 “그래서 여직원들이랑 술 마시는 회식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다”는 자랑스러운 쾌도난마식 해법이 그러하다.

‘한공주’라는 영화가 있었다. 여고생 공주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전학을 간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는 공주를 외면하고, 공주의 인생을 망친 자들은 반성도 사과도 없다. 설상가상 어른들은 공주를 찾아다니며 “내 새끼 앞날을 생각해달라”며 뻔뻔스럽게 탄원서를 들이민다. 그렇게 세상의 공주들이 홀로 남겨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배려도 수치심도 없는 우리에게 공주가 묻는다. “제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왜 도망가야 해요?”

그렇다. 공주에겐 잘못이 없다. 8년 전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한 안태근, 안태근의 성추행을 덮어버린 최교일, 침묵으로 지지하고 모른 척 방관한 이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 이쁘다는 칭찬이, 친근감의 표시가, 웃자고 한 농담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그들은 모른다. 이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 동료, 선후배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의 그림자다.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판사는 서 검사의 폭로 후 자신의 SNS에 “미투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퍼스트(#MeFirst·내가 먼저) 운동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8년 전 장례식장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라도 ‘그러지 말라’ 정색하고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가 죄가 되듯, 알고도 모른 척하는 침묵과 동조 또한 큰 죄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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