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정현과 조기 교육

  • 박재일
  • |
  • 입력 2018-01-31   |  발행일 2018-01-31 제31면   |  수정 2018-02-14
20180131

세계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에서 4강(强)에 오른 만 22세의 정현은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테니스를 시작했다. 일종의 조기 교육이다. 테니스 선수인 아버지의 DNA도 결정적이었겠지만, 뼈가 굳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 라켓을 잡았다면 오늘의 정현은 없었을 것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스타로 떠오른 손흥민 선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축구선수였던 그는 무척 어려서, 어쩌면 공을 찰 수 있는 동작이 가능한 나이 때부터 축구를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축구 과외교사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키를 키워야 한다고 우유를 엄청 먹였다고 한다. 그의 키는 183㎝다.

내 조카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피아노 유학을 하고 있다. 오사카, 이탈리아 등지의 콩쿠르에서 상위에 입상할 정도로 잘 친다. 내기 보기엔 세계적 스타로 떠오른 ‘조성진’을 떠올린다. 조카에게 너는 언제쯤 조성진 정도가 될까 하고 물었다. 답이 이랬다. ‘조성진처럼 하려면 좀 더 어릴 때, 유치원 혹은 초등 저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조기 교육의 힘이 숨어있다는 의미다.

정현이든 손흥민이든 또 내 조카든 또 다른 공통점은 영어를 무척 잘한다는 점이다. 정현의 영어 인터뷰는 만천하가 아는 화제가 됐다. 1만5천명 관중 앞에서 가슴속 느낌을 능숙한 영어로 풀어냈다. 손흥민의 영어도 굳이 말할 게 없다. 사실 다들 일찍 외국으로 유학을 간 경험 때문이다. 조기 교육과 유학, 그건 지금의 기성세대와 다른 교육방식이기도 하다.

문재인정부가 영어유치원(사실 학원이다), 그러니까 조기 영어교육을 놓고 혼선을 빚었다. 안 된다고 했다가 또 허용한다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내린 결론은 우리가 교육에도 이념을 투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이다. 아직도 영어 하면 제국주의 언어, 반미(反美) 성향 이런 것들과 중첩돼 보고 있다는 의구심이다. 영어는 이미 세계 공용어다. 지배적 언어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열람되는 정보의 90% 이상은 영어로 쓰여 있다는 분석도 있다. 조선시대 3~4세 때부터 중국 언어인 천자문을 읽고 깨쳤다는 신동 이야기가 많은데, 지금 와서는 왜 영어를 일찍 공부하겠다는 것을 막아야 할까.

또 하나 한국사회가 교육에 대해서는 ‘솔직한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위선적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조기교육, 선행학습, 유학 이런 개념들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살인적 경쟁, 불평등, 비인권적 교육환경과 오버랩시킨다. 맞는 말이기도 한데, 정작 당사자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자율형 사립고, 외국어고를 적대시하는 고위직 관료나 정치인들의 자식은 하나같이 외국어고를 다니고 조기 유학을 간다. 배반적인 행동이다. 반미 한다는 정치인들마저 자기 자식은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조기 교육은 따지고 보면 노력과 결부된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뜻이다. 손흥민은 하루 1천번 슈팅 연습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정현이나 조성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조카는 유럽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 “요즘 우리 애들(유럽)은 클래식을 하지 않는다. 한국이 부럽다.” 사실 진정 걱정되는 것은 조기 교육이나 과열된 교육열이 아니라, 행여 대한민국이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런 조짐이 있다. 한 해 100만명 태어나던 대한민국 신생아는 이제 30만명대로 떨어졌다. 저출산 다음에 오는 것은 선진국의 예에서 보듯 교육에 대한 냉담이다. 더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교육열을 부도덕한 것쯤으로 매도하는 경향마저 생겼다. 그렇다면 미래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내팽개치고 교육을 시키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도래할지 모른다. 정치는 당장 이런 재앙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는 데 골몰해야 한다. 30년 전 올림픽 직후 이미 가정 출산은 2명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국가는 둘만 낳아, 심지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엉터리 정책을 폈다. 교육마저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면 나라가 드디어 망할 수 있다.

편집국 부국장 겸 정치부문 에디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