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이탈리아 아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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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26   |  발행일 2018-01-26 제37면   |  수정 2018-06-15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나고 묻힌 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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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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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클라라 성당 내부. 중앙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성 프란체스코가 기도했던 ‘다미아노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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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신전. 지금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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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시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아시시 전경. 오른쪽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건축물이 14세기에 지어진 요새 로카 마조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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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 거리.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성 프란체스코(1182~1266), ‘평화의 기도’ 중에서

예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나는 아직 신앙 하나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가장 예수를 닮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의 이 기도는 언제나 마음을 울린다.

성 프란체스코라는 이름만으로 무작정 이 도시를 가보고 싶었다. 그가 태어나고 묻힌 아시시! 게다가 성녀 클라라까지.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나 멋진 건축물, 유서 깊은 역사 등 사람을 끌어들이는 도시에는 수많은 매력이 있지만 내가 도시를 꿈꾸고 기억하는 방법은 늘 사람이다. 그러니 아시시(Assisi)에 대한 꿈은 유럽 대륙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시작된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로마서 310㎞…수바시오산 중턱의 도시
3만명 안되는 인구에 성당만 100여개
성당이 된 신전 등 옛 로마 유적도 다수
가파른 언덕 오르니 먼저 성 클라라성당
구시가지 서쪽 끝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청빈 실천’ 800여년 前 그들 삶의 흔적


아시시는 3만명이 못 되는 인구에 성당만 100여 개가 있는 종교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종교 건축물이고 성지다. 로마에서 310㎞ 정도 떨어져 있는 아펜니노 산맥의 수바시오 산 중턱에 자리를 잡은 이 도시는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움브리아주 페루자현에 속한다. 움브리아 지역은 토피노강과 키아시오강을 끼고 드넓은 움브리아 평야가 펼쳐져 있다. 기원전 1천년경부터 움브리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 이후로 로마인들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지금의 도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성벽과 광장, 원형극장, 미네르바 신전 등이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힌다. 또한 1997년에는 폼페이 유적지처럼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잘 보존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238년에 아시시는 코스타노에서 순교한 루피노 주교에 의해서 기독교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이 성지가 된 것은 순전히 성 프란체스코 덕분이다. 이 지역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인 프란체스코는 한센병 환자와 만나는 경험을 통해 성직에 들어서게 된다. 아시시 변두리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 거처를 잡은 그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라는 말씀을 듣고, 집안 재물을 팔아 성당 재건을 시도했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자 막대한 유산을 포기하고 부자관계까지 끊고서 고행과 청빈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차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작은형제회’가 설립되었다. 성직자가 아닌 이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렀으므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은 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면서 집집마다 음식을 구걸하며 돌아다녀 ‘탁발수도회’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프란체스코의 삶과 가르침은 동시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아시시 귀족 가문 출신 클라라(1194~1253)는 1212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듣고 그의 수도자가 되었으며, 얼마 후 훗날 ‘클라라회’로 불리는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했다.

좁고 굽이진 거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 아시시는 수바시오산 자락에 건설된 성벽 도시다. 산자락 아래 평지에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유적은 성벽 안의 구시가지에 있다. 성벽 밖에 주차를 하고 숨이 가빠올 만큼 언덕을 오르니, 먼저 성 클라라 성당이 나타났다. 13세기 중엽에 건설된 이 성당은 외부에 세 개의 큰 부벽과 네모난 종탑이 있으며, 내부에는 몇 명의 화가들이 돌아가면서 성 클라라의 전설을 프레스코화로 그려 놓았다. 성 클라라 성당은 프란체스코와 함께 교회 쇄신운동을 벌였던 클라라를 기념하는 성소이자 클라라 수도회의 본산이다. 이곳에는 클라라의 복원된 유해를 모셔놓았을 뿐 아니라 귀족이었던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수녀원에 들어갈 때 자른 클라라의 갈색 머리채도 보관되어 있다. 이 외에도 프란체스코와 클라라의 누더기 옷, 프란체스코가 기도했던 ‘다미아노 십자가’ 등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누더기 수도복은 말 그대로 거지 옷이다. 두 벌로 40년을 입으셨다는 성철 스님의 누더기 가사와 꼭 닮았다.

클라라 성당을 나와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가려면 코무네 광장을 지나야 한다. 이 광장은 구 시가지의 중심이다. 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미네르바 광장과 신전 등 중세 유럽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로마 유적을 만날 수 있다. 미네르바 신전은 1세기경에 지어졌는데, 1539년에 교황 바오로 3세의 지시로 성모에게 바치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소프라’는 ‘위’라는 뜻으로 ‘미네르바 신전 위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는 뜻이다. 그 후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미네르바 신전 맞은편에는 여행안내소가 있으며, 그 옆의 시민의 탑에는 4t 무게의 ‘찬미의 종’이 걸려 있다.

로마시대에 공공광장인 포룸으로 사용되었던 산 루피노 광장도 인근이다. 광장 앞에 있는 산 루피노 대성당은 1036년 무렵 우고네 주교가 대성당으로 다시 지었다. 이 성당은 프란체스코와 클라라가 세례를 받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아시시의 대성당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프란체스코가 자신의 삶을 반대하던 아버지 앞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막대한 재산의 상속을 거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입구 오른편에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세례를 받은 수반과 그들의 동상이 서 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구시가지 서쪽 끝에 있지만 성 프란체스코의 숨결이 묻어있는 아시시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성 프란체스코를 기념하고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지은 이 고딕양식의 성당은 1228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1253년에 완공되었다. 1층 내부는 전체가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다. ‘성 프란체스코의 거장’으로 전해오는 무명 화가들을 비롯하여 조토, 치마부에, 피에트로 로렌체티, 시모네 마르티니 등 유명화가의 작품들이다. 2층 내부는 성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또 성당 지하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소박한 유물 전시실이 있다. 프란체스코는 죽은 지 2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범죄자들의 처형장소인 ‘지옥의 언덕’에 위치한 빈민들의 묘역에 묻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그의 유해는 이 근사하고 화려한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으니, 남겨진 자들의 포기하지 못한 세속적 욕망을 나무랄 것만 같다.

이 밖에 수바시오 산 계곡에 자리 잡은 카르체리 수도원이나 신시가지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도 두 성인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특히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성당 속의 성당인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을 품고 있다. 프란체스코가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처음 성당 재건에 나섰다는 포르치운쿨라 예배당은 가로 4m, 세로 7m의 작은 성당이지만 ‘작은형제회’가 태동한 자리이며, 프란체스코가 선종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 밖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욕정을 이기려고 뒹굴었다는 작은 장미정원이 있다. 그를 불쌍히 여긴 하느님께서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가시를 없애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신기하게도 이곳의 장미꽃에는 지금도 가시가 없다고 한다. 또 성 프란체스코 동상 앞에는 하얀 비둘기 한 쌍이 70년째 대를 이어가며 동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사랑과 평화를 역설했던 프란체스코의 동상을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부부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시시의 여러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시시의 진짜 유산은 프란체스코와 클라라의 정신이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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