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訓手(훈수)와 지적질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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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6   |  발행일 2018-01-16 제30면   |  수정 2018-01-16
그림 속의 산해진미보다는
내 앞 밥 한 공기가 더 의미
후대에게 희망을 준 분들은
좌파우파 정치인이 아니라
희생의 삶 산 부모님 세대
[화요진단] 訓手(훈수)와 지적질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1960~70년대에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며 자랐던 세대에게 초콜릿과 바나나는 위시리스트 맨 앞이었다. 맛보는 것은 고사하고 실물을 보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던 시절, 형언하기 힘든 그 독특한 향과 맛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누군가 바나나 껍질만 자랑해도 부러웠고 은박지나 기름종이에 묻어있는 초콜릿 흔적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도 행복했다. 지금은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 초콜릿과 바나나는 진짜 그런 대접을 받았다.

그 당시엔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부는 맞았고 상당수는 아니었다. 탐나고 귀한 것은 여전히 능력과 여유를 필요로 했다. 나이만 먹는다고 그냥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힘이 있거나 부자여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냉엄하고 암호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장삼이사들은 발버둥쳐도 제자리만 맴돌 뿐 삶의 질은 세월을 역주행하는 느낌이다.

너나 없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 부모님들은 온몸으로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족과 미래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식들을 강하게 키웠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덜 써야 생활이 나아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처럼 믿고 살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암호를 풀었고 덕분에 가정과 나라의 살림살이는 차츰 나아졌다.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보수나 진보 따위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어찌보면 국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예측가능했던 시대를 살았을지도 모른다. 성실과 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그땐 자식들 교육이나 내 집 마련 등에 대한 계산이 섰다. 희망이 있는 삶은 고생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힘들 때마다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선순환구조로 작동했다. 산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세상은 점점 더 기하를 요구하면서 꼬인 것이다.

알다시피 성장이 멈추거나 더딘 시대에 어려운 계층이 잘사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장기판 훈수도 판세를 이해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지 값어치가 있지, 쥐뿔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불거려봤자 그건 지적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훈수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양심이 있지만, 지적질은 그저 고약한 취미생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후폭풍은 어떨지 등은 관심 밖이고 배설의 쾌감만 좇기 마련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언제부터 정부가 국민의 삶을 그렇게 진정으로 걱정해줬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표하고 맞바꾼 어설픈 지원이 행여 많은 이들의 자립의지를 꺾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반듯한 경기장을 원했더니 심판까지 자처하며 하향평준화의 늪으로 빠져든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대부분 시혜적이고 베푸는데 맞춰져 있어 그 효용성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 OECD 회원국이 됐고 세계적인 교역국 반열에 올랐다. 누구의 힘이었을까. 정부의 공인가. 정치의 결과물인가. 백 번을 양보해도 동의하기 힘들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성실하고 순박했던 우리 부모님들이었다. 아들이 ‘솔’을 들고 다닐 때 ‘청자’나 ‘환희’를 태우고 자식들 따뜻한 밥 먹이려 돌아서서 식은밥을 드셨던 그들이 진정한 애국자였고 ‘열사’였다.

평등과 동등을 착각해서는 안되듯, 훈수와 지적질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어설픈 이론, 막연한 기대, 긍정적 추측만으로 섣불리 뭔가를 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는 실패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하물며 그 대상이 국가와 국민이라면 돌이킬 수 없다. 좌든 우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의 적폐와 무능을 단죄한다고 하지만 국가와 국민은 그저 볼모일 뿐이다. 시작할 때마다 “이번만은 다르다”고 강변하지만 역사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어떤 훈수자가 이런 말을 했다. 모두가 평등을 추구할 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만 모두가 동등을 원할 때는 혼란과 빈곤의 세상이 된다고.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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