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산청군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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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9   |  발행일 2017-12-29 제36면   |  수정 2017-12-29
“내 어찌 흙에 묻힐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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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구형왕릉. 홍살문을 지나면 능의 경역이다. 삼문을 지나면 능과 마주하고 능의 오른쪽에는 재실인 보능각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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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초입 김수로왕의 태왕궁 터를 알리는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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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흥무왕김유신사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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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전.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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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72현 중 한 분인 농은 민안부의 정자, 망경루.

돌산이다. 하얗게 얼어버린 계류 너머 산 속의 산이 누워있다. 어둠 가득한 저 산의 광물적 광채에 무릎이 떨린다. 빛도 바람도 없는 저 깊숙한 밑바닥의 천오백 년 긴긴 세월이 궁금해 몸살이 난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의 무덤이라 믿는다.

◆전 구형왕릉

다만 왕릉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이다. 구형왕은 구해왕(仇亥王)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겸지왕의 아들이자 김무력의 아버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재위했던 그는 가야시대 가락국(駕洛國)의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구형왕은 ‘흠 있는 자신을 흙에 묻지 말고 돌로 덮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학계에서는 아직 이곳을 왕릉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러한 형식의 왕릉은 없었다. 일부에서는 석탑이나 제단일 수도 있다는 추측도 한다. 그래서 고집스레 ‘전(傳)’ 자를 붙인다.

무수한 작은 돌들이 쌓여 7단 피라미드를 이루었다. 높이 7.15m. 경사진 언덕에 기대어 있어 평지의 피라미드와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누워있으나 일어서려는 것처럼, 편히 눕지 못하고 허리를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고 중앙에는 용도를 알 길 없는 작은 감실이 있다. 무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왼쪽에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로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돌짐승(石獸)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석물들은 최근의 것이라 한다. 이 전체를 낮은 돌담이 원을 그리며 감싸고 있다.

가을 낙엽은 돌무덤을 피해 떨어진다 한다. 산새도 능 위로는 날지 않는다고 한다. 칡넝쿨 한 가닥도 능을 범하지 않고 흙먼지 한 점도 능에는 쌓이지 않는다고 한다. 고증을 위한 발굴 조사를 시도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훼손은 물론,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쌓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수만 개의 돌은 똘똘 뭉쳐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무덤이나 죽음은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이고, 비극적이면서 일상적이다. 그러나 ‘전 구형왕릉’은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것은 오히려 생의 절망적이고도 빛나는 상징으로 마주 서 있다.

김유신의 祖父이자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유언 따라 쌓은 7단 돌무덤
경사진 언덕에 높이 7m 피라미드 양식
낙엽도 산새도 능위로는 날지 않는다고

왕릉 있어 왕산…초입에 내력 알리는 碑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태왕궁 터 비각
맞은편에 김유신의 무술연마 자리 비석
마을엔 구형왕·왕비 위패 모신 덕양전


◆왕산과 덕양전

왕릉이 있어 산의 이름은 왕산이다. 산청 방장산(지리산) 중 하나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이다. 구형왕릉으로 가는 왕산 초입에 있는 비가 산의 내력을 알려준다. 길 왼쪽 단청이 화려한 비각 안에 판독이 어려운 커다란 비가 모셔져 있다.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태왕궁 터를 알리는 비다. 김수로왕은 첫째 왕자 거등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이곳으로 들어와 별궁을 짓고 기거하며 궁은 태왕궁, 산은 태왕산이라 했다. 구형왕은 532년 신라 법흥왕과 낙동강 유역에서 국운을 건 전투를 벌인 끝에 항복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만다. 나라를 잃고 신라의 신하로 전락한 구형왕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시조의 자취가 서려있는 태왕산으로 들어가 별궁을 짓고 수정궁이라 편액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형왕은 생을 마감한다. 태왕산이 바로 이곳, 왕산이다.

김수로왕의 태왕궁지 비각 맞은편에는 산 아래 땅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대(臺)와 같은 자리에 김유신 장군의 비가 서있다. 비문은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金庾信射臺碑)’라고 새겨져 있다. 김유신이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는 자리다. 그는 왕릉 옆에 단을 쌓아 구형왕의 수정궁을 옮겨짓고 7년간 제향을 받들었다고 한다. 현재 구형왕릉 옆의 석축단과 재실인 보능각, 고직사 건물이 그 흔적이다.

이후 수정궁터에는 왕산사(王山寺)라는 절이 들어선다. 왕산사 역시 사라지게 되지만 조선 정조 때인 1793년 절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왕과 왕비의 초상화와 활, 칼, 옷 등의 유품이 발견되었다. 이때 구형왕의 후손들이 사적 보호를 위해 수정궁 재실을 보다 크게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수정궁은 고종 때인 1878년 덕양전(德讓殿)으로 개칭했다.

현재 덕양전은 왕산아래 화계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왕릉 옆에 있던 것을 192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크게 중건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한 채 가슴보다 높은 담 너머를 발끝으로 들여다본다. 홍살문을 앞세우고 10여 채의 기와집이 가지런히 어우러져 있어 언뜻 작은 궁궐 같다. 수정궁의 부활이랄까, 가락국의 마지막 궁궐이라 할까. 지금도 구형왕의 후손들인 김해김씨 집안에서는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왕산사 목궤에서 발견된 유품들도 현재 덕양전에 보관되어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덕양전 뒷담을 지나 왕산 골짜기로 들어서는 초입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망경루’라는 편액이 걸린 2층 누각으로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선생의 충절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망경이란 옛 도읍 송경(松京)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농은 선생은 두문동 이후 산청의 생초면 대포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스스로 농은거사라 했다. 조선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자손들은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도록 명했다 한다. 그는 매월 초하루면 왕산 중턱으로 올라가 송도를 향해 곡을 하며 예를 올렸는데, 왕산에는 그가 올랐다는 자취가 ‘망경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 여행정보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광주 방향으로 가다 함양 분기점에서 35번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통영 방향으로 간다. 생초IC에서 나가 남강 건너기 전 좌회전해 임천 따라 계속 가면 금서면이다. 면소재지에서 산청 동의보감촌 방향으로 조금 가면 화계리 입구 길가에 덕양전이 바로 보인다. 덕양전 왼쪽 산길을 오르면 구형왕릉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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