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흙수저와 낙하산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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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9   |  발행일 2017-12-29 제23면   |  수정 2017-12-29
[조정래 칼럼] 흙수저와 낙하산

KBS 2TV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이 최고 시청률을 돌파하며 장안의 화제다. 연령대별 고른 시청률 분포를 보이지만 중장년층 중에는 본방사수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볼 만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거란 자신감의 발로다. 정작 드라마의 줄거리는 단순하고 뼈대는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계속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은 빠른 이야기 전개와 연기력에서 나온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코드는 흙수저 집안의 불편한 가족관계 톺아보기다. 특히 흙수저 자식들의 고군분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흙수저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의 리얼한 연기는 폭넓은 공감대를 자아낸다. 한마디로 흙수저 가족의 고단함을 그려낸 황금빛 내 인생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것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고단하기 때문일 터이다.

통계층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30세 미만 소득 1분위 계층(하위 20%)의 월 소득이 78만1천원으로 집계됐다. 우리 청년들이 ‘88만원 세대’에서 ‘77만원 세대’로 전락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66만원 세대’도 머잖았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고용절벽에 내몰린 청년들이 부모의 경제력을 탓하는 현실이다. 청년들의 고달픔은 기성세대의 자괴감과 하나의 맥으로 상통한다. 청년빈곤도 문제지만 금수저가 양질의 일자리를 독차지하는 채용비리는 흙수저들의 희망고문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간 일자리 불평등 해소는 문재인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인 일자리 늘리기보다 더 화급한 과제다.

올해 터져나온 공공기관 채용비리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다.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이뤄진 공공기관 채용 과정 전수조사 결과, 275개 공공기관 중 94%인 259곳에서 비리가 적발됐다. 이름만 ‘공채’였지 로비와 청탁이 일상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검 반부패부가 7월부터 벌여온 공공기관 채용 비리 중간수사 결과 채용비리에 연루된 공공기관 고위 간부들과 청탁을 넣은 국회의원 보좌관 등 모두 30명을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그러나 비리의 ‘몸통’에 대한 조사와 처벌의지 미흡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채용비리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법적·제도적 장치와 수단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공공기관이 ‘빽’ 없는 청년들을 들러리로 세웠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진다는 취업준비생 아들을 둔 아버지의 하소연을 들을 때만 해도 ‘뭐 그렇게까지야 할까’ 반신반의했는데, 비슷한 처지임에도 공감 능력이 부족했었나 보다. ‘면접을 통과해 최종 합격하는 이들의 경우 국회의원 등 실력자의 ‘빽’을 달고 있지 않은 이가 없다’는 게 아들의 푸념이었단다.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아들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못난 아비는 천생 황금빛 내 인생의 흙수저 아비였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공공기관장들과의 워크숍에서 내년 1월 말까지 채용 비리 근절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대책 마련은 당연하다. 그러나 드러난 비리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단죄가 우선돼야 한다. 채용비리가 이처럼 일상화된 것은 무엇보다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기 때문이다. 특히 청탁의 몸통이랄 수 있는 현역의원 등 갑질 청탁에 대한 조사는 더욱 엄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검찰이 언제까지 ‘깃털’만 잡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나. 흙수저들을 두번 울리는 채용비리는 청산돼야 할 ‘적폐 1호’로 삼는다면 비리의 전후방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

채용비리를 근절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실천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공공기관의 수장으로 내려보내는 낙하산 인사부터 없애는 게 급선무다. 낙하산, 특히 전문성 없는 선거 공신 출신이 공공기관장으로 내리꽂히면 청탁에 휘둘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공공기관장 자리를 대선 승리의 전리품으로 삼는 관행은 언젠가는 폐기돼야 마땅하다. 흙수저의 눈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낙하산과 만나게 된다. 문재인정부가 이런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솔선수범의 의지와 실천력을 보여라.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취임사가 공염불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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