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8] 동화천변의 광해군 태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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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8   |  발행일 2017-12-28 제13면   |  수정 201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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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군주 광해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 대구시 북구 연경동 태봉. 태봉은 광해군의 태(胎)가 묻혀있다는 이유로 ‘탯등’ 혹은 ‘탯덩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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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태실에는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전문가들은 광해군이 폐위 당한 이후 태실이 파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왼쪽 위 작은 사진은 광해군 태실로 향하는 산길 입구에 ‘연경동 태실’이라고 적힌 안내판.

왕자가 태어났다. 3일 뒤 아기 왕자의 태를 일백 번 씻어 항아리에 담았다. 아기왕자의 태항아리는 신중히 택한 날짜에 태봉(胎峯)으로 향했다. 고취(鼓吹)를 선두로 한 행렬은 엄정했다. 지나는 주현(州縣)의 관문마다 누각을 짓고 병장기를 세우고 북을 울렸다. 태를 맞이하는 각 고을의 관원들은 공복 차림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렇게 이 봉우리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태를 묻었다. 왕자가 왕이 되자 태실은 훌륭한 석물들로 꾸며졌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은 홀로, 잊힌 채, 파헤쳐진 왕. 그리고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석물들의 슬픔과 베일에 가려진 듯 생각에 잠긴 침묵뿐이다. 이 슬픔이 끝나야 휴식과 무관심이 필요해질 것이다.

대구에 태 묻은 조선 유일의 왕
석물·석상 등이 훌륭했던 태실
광해군 즉위 초 가봉 완료한 듯

친형 등 죽이고 인목대비 유폐
1623년 서인세력 반정으로 폐위
“그때 태실 파괴되었을 것” 추정


#1. 태봉, 광해군의 태를 묻은 곳

동화천이 흐르는 대구 북구 연경동에 태봉(胎封·胎峰) 마을이 있다. 마을 뒤편에 삿갓 모양의 야트막한 태봉(胎峰)이 솟아 있어 마을도 그 이름 따라 태봉이다. 사람들은 예부터 그 봉우리를 ‘탯등’ 혹은 ‘탯덩이’라 불렀다. 저곳에 태(胎)가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의 제15대 군주 광해군(光海君)의 것이라 했다.

봉우리로 향하는 산길 입구에 ‘연경동태실’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발길 뜸한 흐린 산길을 헤쳐 올라 마루에 가까워지면 바삭거리는 푸른 방수포가 섬처럼 군데군데 흩어져 엎드려 있다. 그것을 살짝 들춰보면 거기에는 이미 오래 상처받은 시간들이 누워 있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육각의 바위, 거북.같이 생긴 석조물, 깨진 비석의 조각들. 이들은 오래전 예와 격식을 갖춰 늠름하게 서 있었을 태실(胎室)의 파편들이다.

태실은 왕실 자녀의 태를 묻은 곳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출산 부속물인 태를 길일을 택해 내항아리(內壺)에 담고 다시 외항아리(外壺)에 넣었다. 그리고 태항아리와 함께 아기의 출생과 태의 매장 시기를 기록한 태지석(胎誌石)을 묻고 태비(胎碑)를 세웠다. 이러한 격식과 절차를 태를 편안하게 하는 안태(安胎), 태를 안치해 묻는 일 자체는 장태(藏胎)라고 한다. 아기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봉분을 해체해 태비를 묻고 부도와 같은 중앙 석물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난간석을 설치했다. 그것을 가봉(加封)이라 한다. 태실 조성의 전통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연경동 태봉에 남아 있는 한 비석에는 ‘왕자경(王子慶)’, 다른 비석에는 ‘용아지씨태실(龍阿只氏胎室)’이란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 있다. 또 다른 석물에는 ‘만력(萬曆)’ ‘십일월일건(十一月日建)’ 등의 글자가 보인다. 이는 왕자 경용의 태실(胎室)임을 가리키는 태비로 비의 건립 시기가 1573~1620년경임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물 근처에 있는 비편에는 ‘만력삼(萬曆三)’ ‘십일월일건(十一月日建)’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이는 가봉비로 여겨지며 1602년에서 1611년 사이의 11월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중구의 우학문화재단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는 태지석과 내외 항아리가 있다. 항아리는 유려한 곡선의 백자이고 태지석은 방형의 오석으로 보물 제1065호로 지정돼 있다. 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皇明萬曆三年四月(황명만력삼년사월) 二十六日卯時生(이십육일묘시생) 王子慶龍阿只氏胎(왕자경룡아지씨태) 萬曆九年四月初(만력구년사월초) 一日癸時藏(일일계시장).’ 이는 선조 8년인 1575년 4월26일 묘시에 왕자 경용이 태어났으며 1581년 태항아리를 묻었다는 뜻이다. 태봉 석물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왕자 경용은 광해군이 분명하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1575년 4월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 행궁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608년 왕위에 올랐다. 대구 사림의 영수인 모당 손처눌의 문집에 보면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오봉 이호민(李好閔)이 태실상사(胎室上使), 광해군 때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김상용(金尙容)이 부상사(副上使)가 되어 와서 연경서원에서 하루 종일 강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광해군 3년인 1611년에 ‘대구부사 안도(安燾)가 수토관(守土官)으로서 태봉을 수개(修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광해군이 즉위한 뒤 가봉이 시작돼 1611년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산과 명당을 찾아 시간과 금전과 노역을 들여 조성한 광해군의 태실은 석물이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석상은 아주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2. 파괴된 태실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지른 비열한 왕, 궁궐을 중수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여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을 노역으로 내몬 폭군, 이것이 광해군에 대한 당대의 평가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돼 국난 수습에 힘썼고 즉위 후에는 자주 실리적 외교로 명·청 교체의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했으며 대동법을 실시해 공납제도의 폐해를 개선한 유능한 군주라는 평가도 있다. 광해군은 대북파를 전면에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다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었다.

전문가들은 광해군의 태실은 폐위 이후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북인을 몰아낸 정변이다. 대구 유림은 남인과 서인이 주류였고, 인조반정에 대부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누군가 광해군 태실에 손을 댔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태실의 부장품을 노린 도굴꾼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석물을 산산조각 내면서까지 도굴할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태실을 파괴하는 저주와 복수의 행태는 더 먼 과거에도 있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 조준(趙浚)은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으로 폄훼하고 그들의 태실을 파헤쳐서 없애자고 주장했다. 조선의 단종(端宗)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후 태실마저 철거되었다. 생명 그 자체이자 이어짐의 실체인 태는 어머니의 몸에서 새 생명이 자라나기 시작함을 의미하고, 어머니가 태아를 키워낸 생명줄이며 어머니와 태아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결합했던 매개이자 어머니와 태아 모두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부모의 생명과 더 나아가 조상의 생명이 닿아 있다. 태실에는 태주와 태의 운명적 상관성, 그리고 생명사상과 조상에 대한 보은이 자리한다. 태실의 파괴는 조상과 이어지는 핏줄을 끊는 일이다. 후손과의 혈맥을 차단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와는 다른 차원의 극형이었다.

광해군 태실의 파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인천이씨(仁川李氏)와 얽혀 있다. 옛날에는 서변·동변·연경동 일대 전체를 무태라 했었다. 서변동과 연경동에는 주로 인천이씨가 모여 살았는데 서변동 일대는 무태파, 연경동 일대는 태봉파로 서로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망하자 무태파에서는 폐주(廢主)의 태실이라 하여 없애려 했고, 태봉파가 반대하는 가운데 무태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인천이씨의 한 집안에서 태실 자리가 정승이 날 명당이라 하여 묘를 쓰다가 첫째 상주와 둘째 상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후 태실을 깨뜨리라는 점괘에 따라 석물들을 깨 태봉못에 버렸는데, 그날 밤 손자가 죽자 사람들은 석물들을 도로 건져내 원래대로 맞춰 놓았다고 한다.

광해군 태실은 누가 언제 어떻게 파괴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2003년 10월에는 도굴되기도 했다. 지금은 다만 깨진 채로 오직 방수포에 덮여 비와 눈과 바람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 도둑들이 더 쉽게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이 고요한 숲에서 저 바삭거리는 소리는 포효와 같을지도 모른다. 태봉마을은 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졌고, 수령 천년의 느티나무와 삼백년의 느티나무만이 남아 마을의 시간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태봉이 있다. 광해군은 조선 왕조 27명의 왕 가운데 대구에 태(胎)를 묻은 유일한 군왕이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심현용 논문 ‘광해군 태실에 대하여’, 홍성익 논문 ‘조선시대 태실의 역사 고고학적 연구’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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