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새봄에는 새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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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5   |  발행일 2017-12-25 제30면   |  수정 2017-12-25
최현묵 대구문화 예술회관 관장
공적자금 제공 시스템에
대상은 길들여지기 마련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동
새봄에 새로운 꽃 피우는
春化현상과 같은 것이길
[아침을 열며] 새봄에는 새 꽃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엄청난 변화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간 한 해였지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일상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여느 연말과 다름없이 조금은 스산하고, 조금은 종종거리며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거리에 구세군은 딸랑이고, 단체들의 송년모임 문자는 쉬지 않고 카톡거린다. 도심 나무들은 꼬마전구에 묶여 화려한 척 빛나고, 그 사이로 북쪽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온 차가운 바람이 이별처럼 광장을 가로지른다.

흔히 다사다난했다고 한다. 일이 많고 힘들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1년을 생각하면 늘 다사다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올해는 특히나 사건이 많았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특히 문화계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1년 내내 시끄러웠다. 뻔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새삼스럽게 부끄러움과 참담함으로 다가온다.

사실 예술인에 대한 보편적인 직접지원제도가 생긴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71년 문예진흥기금제도가 생기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예술인에 대한 직접지원은 없었다. 1990년에 문화부가 생기고 나서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문예진흥기금에 지방비를 매칭하면서 예술인에게 직접지원제도가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예술인 지원에 따른 심사와 평가, 환류제도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영역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됨에 따라 지원사업을 전담하는 문화재단이 속속 발족되기 시작하였다.

역설적으로 예술인의 자율성은 오히려 지원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반 예술이 익명화된 다수의 고객에게 소비될 때를 제외하고는 예술의 자율성은 늘 자본 혹은 권력에 영향을 받아왔다. 일부 예술가들이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실험적인 예술의 영역에 도전하였지만, 그러한 도전조차 상업화된 제도 속으로 편입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예술인 직접지원제도가 없을 때에는 예술인이 가난하지만 떳떳한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오히려 예술인이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인에 대한 지원제도가 생기고, 또 확대될수록 대접은 차가워졌고, 예술의 자율성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지원을 받으면 받을수록 심사와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었다.

흔히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원금이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공적자금이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을 공정한 제도나 객관적인 기준도 없이 마구 퍼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제도와 기준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른 심사와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예술에서 심사와 평가는 상당 부분 주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원을 받는 예술인은 공적자금을 제공하는 시스템에 어떤 방식으로든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예술에 대한 지원은 오히려 반예술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디 반사회적인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가치와 관습을 재해석하고, 의문을 던지고,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다. 예술이 기존의 가치와 방식을 답습할 때, 예술은 끝나고 테크닉이 시작된다. 그런데 지원의 심사와 평가는 기존의 방식과 관습에 의존한다. 더욱이 그것이 정치적인 전제조건을 따라야 한다면 정말로 예술은 길을 잃는다.

‘춘화현상(春化現象, vernalization)’이라는 말이 있다. 혹한의 겨울을 겪어야만 봄에 꽃이나 열매를 맺는 현상을 일컫는다. 개나리, 철쭉, 진달래, 그리고 보리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지금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파동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자위해본다. 반대를 용납하고 권장하는 장르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우리 사회가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봄에는 새 꽃이 피어나리라 믿어본다.

최현묵 대구문화 예술회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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