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저무는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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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5 08:07  |  수정 2017-12-25 08:08  |  발행일 2017-12-25 제18면
20171225

겨울 강을 찾았다. 강물은 칼날 바람에 잔주름을 지으며 낮은 신음소리로 울기도 하지만, 해빙을 기다리는 초목들에게 꽃피는 봄날과 여름 날 초원의 축제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며 잠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미루나무는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앙상한 가지에 까치집을 품고 날아가는 철새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극심한 겨울 가뭄에 목이 타는 빈 들녘은 봄비 내린 후 새싹 돋아나는 봄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길 기도하며 긴긴 겨울을 견디어내고 있다. 해지면 강 건너 저 오두막집에도 불이 켜질 것이고, 노부부는 겸상을 하고 마주앉아 대처에 나간 자식들의 안전과 행복을 빌며 힘겹게 숟가락질을 할 것이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태로 기부금에 대한 불신과 반기업 정서로 인한 기업의 기부문화 위축으로 전년도보다 기부금액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금 내 배가 아무리 불러도 이웃이 굶고 있으면 지속적인 나의 행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빈부 격차를 계속 방치할 경우, 우리는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도 주변 어려운 사람들을 눈여겨 살펴보아야 한다.

마오리족에게는 선물의 영(靈) 하우(Hau)가 있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선물의 영 하우도 같이 따라와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계속 머물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 하우는 선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해야 비로소 그 사람에게서 떠나게 된다. 만약 남에게 선물하지 않으면 하우는 계속 그 사람에게 머무르며 저주의 힘이 되어 병이 나게 하거나 죽게까지 한다. 무엇을 받았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돌려주라는 말이다. 준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로에의 수업을 들으며 건축 공부를 한 어느 건축가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미스의 제자는 공부를 하고 작품을 만들 때 스승이 알지 못하고 스승이 옆에 없어도 자신의 작업이 스승의 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스승이 지켜본다는 긴장 속에서 공부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훌륭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스 반 데어로에는 제자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제자에게 건축가로서의 자세와 능력을 선물한 것이다.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귀한 선물, 힘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 수업’에 나오는 이야기다.

낙조의 강물을 바라보며 나에게 물어 본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존재가 남의 고통이 되지는 않는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자식, 선생님, 제자, 선배, 후배, 동료, 이웃, 연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보자. 다사다난했던 정유년이 저물고 있다. 살아남은 모든 것의 가슴에 축복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면 좋겠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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