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커피 이야기 - 추억의 대구다방 <하>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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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2   |  발행일 2017-12-22 제41면   |  수정 2017-12-22
향긋한 커피에 음악·미술 한 스푼
70∼80년대 대구는 ‘음악다방의 도시’
경북대 앞 ‘백악관’ 계명대 ‘가교’ 등
대학가 음악다방은 어림잡아 100여 곳
맥향·이목·유경 등 갤러리형 다방도
동성로 ‘가교2’는 지역 첫 MV전문 카페
90년대 노래방 등장에 사라진 음악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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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동촌유원지에서 부활한 ‘행복의섬’ 내부 모습. 행복의섬은 1980년대 동성로에서 최초로 레이저디스크를 도입해 가장 모던한 음악감상실로 불렸다. 전면의 오픈 뮤직박스가 40년 전 추억의 음악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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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섬’을 부활시킨 DJ 김이수 대표.

원래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약(藥)으로 출발했다. 현재는 석유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은 세계 최강 기호식품으로 등극했다.

한국 커피문화의 첫 교두보는 미군. 1945년 9월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24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한다. 이어 한 달 새 부산과 목포를 통해 각각 제40사단과 제16사단이 들어왔다. 당시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7만여명. 이들 미군에게는 세 종류의 배급식량이 주어졌다. 커피는 ‘C레이션(Ration)’의 한 품목.

이때 미군들이 사용한 커피가 원두일 것 같은데 아니다. 물에 잘 녹게 가공한 인스턴트커피였다. 인스턴트커피 세계화의 선두자는 ‘네슬레’다. 대공황기에 남아도는 브라질 커피를 헐값에 구매해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어 창고를 가득 채울 때쯤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6년간의 긴 전쟁, 미군에게 보급되는 커피는 네슬레가 독점했다. 네슬레는 돈방석에 앉았다. 그럼에도 네슬레가 공급하는 커피만으로는 부족하자 제너럴 푸드, 스탠더드 브랜즈, 보든스 등이 인스턴트커피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다국적 커피는 뮤직카페, 특히 한국에선 다방과 음악감상실을 통해 새로운 맛의 복음을 퍼트렸다.

70∼80년대 대구는 ‘음악다방의 도시’
경북대 앞 ‘백악관’ 계명대 ‘가교’ 등
대학가 음악다방은 어림잡아 100여 곳
맥향·이목·유경 등 갤러리형 다방도

동성로 ‘가교2’는 지역 첫 MV전문 카페
90년대 노래방 등장에 사라진 음악다방
올 4월에 40여년 前 ‘행복의 섬’ 부활
판깨나 돌린 그 시절 DJ들 상당수 포진


◆ 중후한 커피숍 같은 대구 다방들

대구의 커피도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세련미를 갖춘다. 일단 상호가 묵직했다. 1970년대 대구를 주름잡던 다방 상호를 보면 그걸 감지할 수 있다. 귀족, 왕비, 명작, 황실, 왕자, 공주, 황태자, 공작…. 상호가 다들 폼생폼사였다. ‘선민 트라우마’탓인지 너나없이 있어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아방가르드한 다방의 신호탄이었던 박청강의 ‘늘봄’에 이어 동인호텔 옆에서 오픈한 ‘반쥴’도 화제였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사이펀 기술자까지 대동한 레스토랑 같은 커피전문점이었다. 삼덕성당 후문 근처에 있었던 ‘가전’은 당시 가장 고급스럽고 가격도 비쌌다. 일반 다방의 2배 이상이었다. 가전 위층에는 ‘르네상스’란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맥향, 이목, 유경 등은 갤러리 버전의 다방이었다. 당시 고급음악다방은 크게 음악을 위주로 한 ‘음악감상실형’, 그리고 커피 맛을 위주로 한 ‘커피숍’스타일로 나뉘었다. 중매 전문 다방도 몇 있었다. 대구백화점 남문 근처 ‘수다방’과 로얄호텔 바로 맞은편 ‘귀족다방’ 등은 매일 중매족으로 들끓었다. 대구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 ‘시민그릴’은 공연 관계자들이 잘 만나는 ‘그릴 스타일 다방’이었다.

커피 고급화를 선언한 다방 중 하나가 ‘미개인’이다. 동인호텔 맞은편 1층에 있었는데 파격적 상호가 화제였다. 미개인 바로 옆에 반쥴이 있었다. 미개인은 사이펀커피 추출 광경을 칵테일바쇼처럼 바텐에서 직접 보여줬다. 대구백화점 앞 ‘에뜨랑제’는 객석마다 헤드폰을 장착해 놓아 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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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동 DJ가 전해준 80년대 ‘가교2’의 내부 사진.

‘레떼’도 상당히 파워풀했다. 현재 금곡삼계탕 맞은편에 있었는데 여긴 개별 의자 대신 라운드테이블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탠드바 같은 분위기였다. 당시 지역 연극인들이 거기 입구 문에 연극포스터를 가장 붙이고 싶어했다. 이 밖에 한일호텔 뒤편에 있었던 ‘뜨락’도 멋쟁이 다방으로 불린다.

휴대폰·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학마다 자기 학교 전용 ‘아지트 다방’을 지정해 놓았다. 영남대 5월회의 경우는 중앙파출소 앞 예림사진관 옆 지하 ‘귀로다방’에 진을 쳤다. 학생들 가방을 맡아주기도 하고 일일찻집도 자주 열었다. 시화전도 다방의 몫이었다. 고교생 시화전은 YMCA 2층 복도, 대학생은 ‘심지’, 상급 모던보이들은 ‘전원’으로 갔다. 전원의 경우 클래식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형 커피숍이었다.

북성로 입구 맞은편에 있었던 ‘미주다방’은 1980년 등장하면서 통유리창 테라스를 도입한 핫플레이스였다. 칵테일잔에 드라이아이스를 깐 아이스크림을 처음 선보인다. 코리아음악감상실 근처에 있었던 ‘예지다방’은 뮤직박스가 이색적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뮤직박스는 유리로 꽁꽁 막혀 있었는데 예지는 폐쇄형 유리박스가 아니라 완전히 오픈된 형태였다. 당시 예지다방의 주인마담은 답답한 것을 싫어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꼭 뮤직박스에 유리가 둘러처져 있어야 하냐”며 DJ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과감히 오픈박스를 음악다방 가운데에 처음으로 설치해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DJ들은 시끌시끌한 손님들의 대화와 고함소리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 부활한 행복의섬

당시 핫플레이스 중 하나는 대학가 음악다방이었다. 경북대 정문 앞은 ‘백악관’, 계명대 근처에는 ‘가교’가 유명했다. 특히 가교는 늘봄처럼 동성로에 ‘가교2’를 냈는데 지역 첫 뮤직비디오 전문 음악카페로 기록된다. 당시 대학가 음악다방은 얼추 100군데가 넘었다. 무려 500여 명의 DJ가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점차 동성로 음악감상실 DJ로 옮겨간다. 당시 런던제과 네거리는 동성로에서 가장 핫플레이스였다. 그 상권은 한일극장 앞길에서 끝이 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구백화점 상권이 절정기를 맞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백화점 근처는 좀 썰렁했다. 한일로는 한강이었다. 서울로 비교하자면 개발 직전의 강남이 바로 대구백화점 상권이었다.

코리아음악감상실은 1만5천여 장의 LP음반을 보유했다. 400석 이상의 객석. 소극장 같았는데 한강 이남 최대 규모였다. 5층에는 코리아디스코텍, 지하에는 음악다방까지 있었다. 3층에는 파도클럽, 1층에는 초밥전문 홍학이 있었다. 거기서 배출된 대표적인 DJ가 바로 요즘 대구교통방송의 양대 DJ로 활동 중인 김병규와 김윤동이다.

1970~80년대 대구는 음악다방의 도시였다. 1985~86년에는 무려 22개의 음악감상실이 동성로에 밀집해 있었다. 그 이름을 열거해본다. 녹향, 코리아, 시보네, 모래네, 셀부르, 카네기, 빅토리아, 크로바, 포크니, 에뜨랑제, 아도니스, 무아, 행성, 아카데미, 영시네마, 토탈, 아람하우스, 하이마트, 가교2, 아미, 김병규음악감상실, 리멘녹시타 등. 대구백화점 서쪽 맞은편 골목 안에 있었던 ‘포그니’는 일명 ‘은하골목’으로 불렸다. 삼성라이온즈 선수들이 은하목욕탕을 자주 이용한 때문이다.

대다수 1990년대로 못 넘어오고 문을 닫는다. 1992년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디스코장, 프로야구, 비디오방과 노래방(93년에 유신학원 근처에 도레미노래방이 생긴다)…. 음악감상실에 굳이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즐길거리가 무진장했다. 포그니가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다 사라진다.

1996년쯤 달서구에 ‘솟대마을’이란 음악카페에 추억의 DJ가 속속 모여든다. 김병규, 유진혁, 김이수, 김광선 등이다. 하지만 문을 닫고 재차 10여 년 전 동촌으로 옮겨와 지금은 막창집 시대를 연다. 2004년 김병규 DJ가 두산오거리 근처에서 잠시 감상실을 차렸지만 문을 닫는다. 그러곤 LP카페가 우후죽순 돋아났다. 그런 토대를 딛고 지난 4월 바로 동촌유원지 솟대마을 옆에 추억의 음악감상실이 부활한다. 1977년 중앙파출소 가는 길에 있는 SS패션 4층에서 태어난 ‘행복의섬(행섬)’이다. 행섬은 몇 가지 측면에서 기념비적이었다. 당시 무아(79년)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업그레이드된 감상실이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레이저디스크가 들어왔다. 장당 13만원 정도. 등받이마다 개인용 헤드폰이 걸려 있었다. 전속 DJ는 10여 명. 김종철, 김지호, 양윤석, 정민, 이병국, 강영민, 김진호, 이천희, 김이수, 한인수, 김현석 등이었다. 화교 출신 DJ(갈장명)도 있었다. 1990년 화재가 나서 4개월 뒤 재오픈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좌장 DJ는 김종철. 그는 매주 DJ를 대상으로 깐깐하게 음악시험까지 봤다. 그때를 잊지 못한 듯 그는 지금 중구 교동시장에서 ‘예전레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행섬의 15년 구력의 DJ 김이수씨. 그가 대구 음악다방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초대 사장 김종서와 공감대를 갖고 행섬을 재오픈했다. 정면에 강력한 포스의 오픈 뮤직박스가 여전히 구수하게 빛나고 있다. 김윤동 DJ도 김이수 DJ와 손을 잡았다. 그는 음악다방과 대구DJ의 지난날을 공연극 형식으로 올리기 위해 5년간 다져온 대본의 막바지 수정작업을 하고 있다. 조만간 대구DJ 봄날이 휘영청 개화될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도움말=김이수·김윤동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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