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2017년에 떠난 17인에 대한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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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2   |  발행일 2017-12-22 제39면   |  수정 2017-12-22
불꽃 같은 삶, 잊지 않을게요
[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2017년에 떠난 17인에 대한 추모
[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2017년에 떠난 17인에 대한 추모

작년, 아니 올해 초에 ‘2016년에 떠난 16인’식의 제목을 달고, 한 해 동안 우리 곁을 떠난 문화예술인을 이 코너에서 다뤘다. 아직도 해가 바뀌려면 며칠이 더 남았는데, 이제 하나둘씩 마무리하려는 마음에 조급증이 생겼다. 올해는 17명을 떠올린다.

존 버거는 화가로 출발했지만 미술평론가로 더 이름을 알린 영국인이다. 그가 쓴 ‘보는 방법’을 대학생 때 읽었다. 술술 읽히던 그 글솜씨에 탄복했다. 쉽고 간결한 설명이 몇 문장 이어지다가 턱 하니 던진 의도적인 변칙 구문, 그 이전에 해박한 예술 지식, 그리고 더 이전에 선명한 사회 현실에 관한 인식.

역시 같은 영국 사람인 존 웨튼을 아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프로그레시브록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도 연주하고 노래도 하던 로커다. 특히 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 사람이 속한 밴드의 아시아 인기는 대단했다. 그 당시 예술로서의 록을 하는 연주자들에겐 뭐랄까, 최소한의 인원이 최대한 풍부한 음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베이스와 리드보컬의 겸업도 그 배경의 한 줄기 이유인 듯하다. 역시 2016년에 세상을 떠난 그렉 레이크도 존 웨튼과 비슷한 예였고, 나는 이 둘을 따라하려고 무지하게 애썼다.

미국의 재즈 가수 알 재류는 브루스 윌리스와 시빌 셰퍼드가 나왔던 탐정드라마 ‘문라이팅’ 주제가로 널리 알려졌다. 몽롱한 팝 발라드 ‘After All’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그가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찾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배 DJ가 했던 말이 “영어를 잘 못하는 내 귀에도 쏙 들어올 정도로 느리고 또박또박한 발음을 하시는”이었는데, 그의 발음은 목소리를 악기로 쓰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교범이었다.

존 웨튼이나 알 재류만큼의 음악성은 없었지만, 아주 짧은 기간 큰 인기를 누렸던 타미 페이지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인가 누가 한국계이고 해서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나와 동갑내기인 이 왕년의 아이돌 가수는 세상을 뜨기에 이른 나이였다.

로큰롤의 창시자, 척 베리는 뭐라고 해야 되나, 내 머릿속에는 까마득한 예전에 저세상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 속 인물이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내가 이렇게 이승 사람인지 저승 사람인지 헷갈려 하든 말든 그는 평생을 수많은 명예 무대에 헌정되고 저작료도 챙기며 안락하게 살았다.

철학자 박이문 교수의 부음도 있었는데, 그가 떠나기 얼마 전 박이문 전집을 선물 받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예술철학’은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는 별도로 내게 남은 선생의 글은 ‘출판저널’ 초기에 실린 인터뷰였다. 거기서 박 교수는 지금은 그 자체가 우스운 농담이 되어버린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끝없이 자신에게 묻는 게 철학자의 태도라고 밝혔다.

연기자 김영애의 마지막 열정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특별히 내 감상을 더 소개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배우 윤소정은 김영애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마이너리티’한 면이 많았던 여배우였다. 내게는 김영애를 TV드라마 연기자로, 윤소정을 연극배우로 분류해야 된다는 어떤 생각이 있다. 김영애가 정석 수학이라면, 윤소정은 해법 수학 교재 같은 얼터너티브의 미학으로 가르고 싶다.

로저 무어 하면 ‘007’이지만, 007이라면 그가 아니라 숀 코너리란다. 어릴 때부터 이런 평이 불만스러웠다. 내가 보기 시작했던 007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주연배우가 로저 무어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나온 다른 모든 어린 제임스 본드들이 배우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역에서 물러났는데, 로저 무어는 007에서 굳어진 이미지를 끝내 벗어날 수 없었다.

라디오 팝프로 DJ 박원웅은 처음부터 연륜 있는 어른의 목소리였다. 그냥 시간 속에 걸러진 추억 같기는 한데, 그가 좋아했고 그래서 방송에서 자주 나왔던 곡이 마이클 크레투의 ‘문라이트 플라워’였다.

영화감독 조지 로메로의 죽음 이전에, 나는 종종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같은 좀비영화의 대부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그의 묘는 어떻게 꾸며질지 궁금했다. 실은 로메로의 공포영화 같은 B급 오락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이었으나, 내 앞에서는 교양 있다고 뽐내던 사촌 누이가 있었는데, 그 문화적 세련됨의 기준이 조동진을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중1이던 나는 몰랐는데, 중3이던 누나는 내게 조동진 노래에 앞서 이 가수의 삶을 먼저 가르쳤다. “조동진은 음반 취업을 할 자금이 없어서 공사판에서 막노동으로 마련한 돈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앨범을 냈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걸작이란다.” 난 조동진의 팬이 되었고, 이후에 들국화, 시인과 촌장, 어떤날 등이 줄줄이 나와서 조동진 선배를 가장 존경한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올 한 해 동안 성불평등 담론이 낳은 수많은 논쟁거리 속에서 하필이면 자살로 마감한 인물이 마광수 교수라는 건 또 어떤 의미로 남을지 모르겠다.

미국의 팝스타 톰 페티를 아는 이는 드물 것 같다. 나 또한 이 사람이 80년대에 냈던 음반 한 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사람이 미국 바깥으로 좀 더 유명해진 건 80년대 말 트래블링 윌버리스라고, 포크 대가 밥 딜런, 비틀스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 맹인 가수 로이 오비슨, E.L.O.의 리더 제프 린이 뭉쳐서 그룹을 만들었을 때였다. 이미 그들 중 여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목소리만 들어서는 제일 골골대던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도 받고 여전히 건강한 걸 보면 인생은 모를 일이다.

일단 양해부터 하고. 자기착각은 아니다. 나도 아니란 건 아는데, 내가 닮은 유명인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황치훈이고 다른 한 명이 김주혁이다. 지난가을에 병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삶의 마침표를 찍은 황치훈이다. 김주혁을 챙겨봤던 기회는 내게 ‘응답하라1988’밖에 없었는데, 윤상이나 황치훈이나 김주혁이나 나 같은 우리 또래에게 한국 대중문화의 출발은 황치훈이 가수가 되었던 그 무렵이었다. 끝으로,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쉰다섯의 이른 나이에 뇌종양으로 숨을 거둔 러시아 출신의 바리톤 성악가를 예전에 접했을 때 난 왠지 은발의 백작 같은 그의 외모에 이름 또한 발음하기 어려워 그리 탐탁지 않았다. 난 차이콥스키나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를 즐겨 부르던 그가 독일 가곡에 도전해서 명반 한 장쯤은 남겨주길 바랐다.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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