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새해소망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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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1   |  발행일 2017-12-21 제31면   |  수정 2017-12-21
[영남타워] 새해소망
이은경 경제부장

며칠 전 지인이 이사 소식을 전해왔다. 법원 근처에서 자영업을 하는 그가 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의외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시위 확성기 소리 때문이었다. 확성기 소리가 가 닿고자 하는 곳은 법원일 터. 하지만 정작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시위 현장 인근의 애꿎은 시민들이다.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절규와 외침이 그들에겐 그저 견디기 힘든 소음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대화조차 되지 않을 정도”라는 그는 “창문을 꼭꼭 닫아도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항공기 소음 피해는 배상이라도 되지”라며 고통스러움과 억울함을 토로했다.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이사까지 했을까 싶다가, 문득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억울함까지 치밀게 한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아사히글라스 노조였다.

일본 다국적 유리제조 기업 아사히글라스.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구미산단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결성한 뒤 한 달 만에 휴대폰 문자 하나로 해고 통보를 받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이다.

아사히글라스는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등록하고 구미산단 내에서 공장을 가동해왔다.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조건으로 경북도와 구미시로부터 공장부지 33만여㎡ 50년간 무상임대, 5년간 국세 전액면제, 15년간 지방세 감면 등의 혜택을 받고 연평균 1조원대 매출, 매출 대비 10%대 영업이익을 거두는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노동자 1천100명 중 30%는 9년 동안 최저시급만 받았으며, 한 달에 두 번 쉬기 위해 주말엔 12시간 맞교대를 해야 했다. 부족한 인력과 과도한 노동강도를 견뎠으나 권고사직과 집단해고는 심심찮게 일어났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한 지 한 달 만에 회사는 170명에게 문자메시지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꼬박 2년6개월. 직접 고용 지시, 과태료 부과와 같은 노동부의 행정력은 강제성이 없었고 그나마 불법파견 기소 의견으로 사건이 넘어간 검찰에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걸려 있다. 이들이 법원을 향해 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확성기를 틀어놓고 있는 이유다.

인간다운 삶에서 소외되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살자고 하는 노동이 삶을 무너뜨려서는 안되는 일이고, 열심히 한 노동의 대가가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에 그쳐서도 안된다.

열심히 산다 해도 계약직이라면 고작 1년 앞의 삶도 계획할 수 없다. 200여만원(최저시급 1만원·주 40시간 근무)이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 삼겹살 구워 먹는 것도 심사숙고해야 하고 가족여행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사는데 “굶지 않으면 됐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온수역 용역업체 직원 전모씨에서부터 제주 현장실습생 이군, 용인과 평택의 타워크레인까지, 대한민국의 노동잔혹사는 이렇게 진행형이다.

2017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벌어먹고 사느라 예외 없이 힘들었던 한 해다. 그 모든 노고에 따뜻한 위로와 힘찬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새해엔 일할 자리에 관한 권리와 일할 환경에 관한 권리를 모두가 떳떳하게 누릴 수 있기를, 건강한 작업환경,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 합리적인 근로조건의 보장으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노동자의 땀과 눈물을 먹고 자라는 경제 성장 신화 따위는 이제 그만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확성기를 틀어놓고 목이 터져라 외칠 일도 그 소리에 질려 이사하는 사람도 없기를, 기대해본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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