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언제나 세월은 스승이다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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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2   |  발행일 2017-12-12 제30면   |  수정 2017-12-12
겁나는 것이 없던 젊은 시절
이기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
살다보면 능력자 널려있어
세월이 가르치는 삶의 자세
외면말고 받아들여야 행복
[화요진단] 언제나 세월은 스승이다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아기가 1살이면 엄마도 1살이라고 했다. 엄마는 그녀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성장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엄마는 싼 것만 찾게 되고 몸을 낮춘다. 자신이 받았던 사랑의 크기를 새삼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내리사랑을 행하려 애쓴다. 시간이 그녀를 진정한 엄마로 만들어간다.

젊었던 시절. 연세 지긋한 분들 상당수가 소변기 앞에서 뭔가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때 그 이유가 꽤나 궁금했다. 눈높이쯤에 붙어있는 ‘한 걸음 더 가까이’. 위생과 청결한 환경 유지에 협조해달라는 취지다. 아무도 강요하진 않지만 중장년 이상 남자들은 이를 지키려 바짝 다가선다. 몸이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세월이 답을 일러줬다.

돌이켜보면 패기인지 오기인지, 아니면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불분명하던 때가 있었다. 단순하고 무식한 탓에 용감할 수 있었고, 아는 게 좁쌀만 한데 그게 전부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눈은 높은데 손이 낮은 것이 현실인데도 막무가내 우김으로 합리화한다. 내가 불리하면 휴전이나 외면이고, 유리하면 그저 전진과 함께 볼륨을 높인다.

책임은 모르겠고 권리만 주장하는 게 일상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내 차보다 느리면 초보 아니면 멍청이고, 나보다 빠르면 전부 미친 녀석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멋대로 재단하며 살다가, 느닷없이 철이 든다. 멈추기만 해도 민망한데, 돌이켜보면 부끄러움과 후회만 그득하다.

역시 강호에는 고수가 많았다. 넘어지고 깨지면서 절제와 포기를 배웠고 수없이 반복되는 역지사지로 겸손과 양보를 익힌다. 모래알처럼 많은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겪으면 처신이란 말을 곱씹게 된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인사를 받지 못하게 되고, 베풀지 못하는 부류들은 대부분 노잣돈으로 욕 한 바가지를 갖고 가는 게 세상 이치더라.

게임하듯 차를 모는 운전자는 사고를 내봐야 조심을 하게 되고, 불만 많고 지적질이 취미인 사람은 총무를 해보면 달라진다. 걷는 놈 위에 뛰는 놈과 나는 놈은 있기 마련이다. 100개의 이론은 1개의 경험을 이길 수 없다. 젊음과 패기는 분명 필요하고 나름의 장점과 에너지를 가지지만, 세월의 무게와 역사가 버무려진 노련함에는 견줄 수 없다.

기억은 과거를 낭만화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또렷하게 떠올리는 어르신들의 표정에서 회한의 크기보다 미소와 담담함이 더 읽히는 것은 왜일까. 살아보지 않은 세상을 함부로 말하고 단정 짓는 언행은 어리석기도 하지만 무례할 수도 있다. 요즘 시각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면 잘못된 것투성이다.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게 최선이었거나 흐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치기(稚氣)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몸에 돋아난 가시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대부분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 단면만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입체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자신 이외의 사람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 언행은 달라진다. 속도와 강도의 문제일 뿐, 스스로를 낮추게 된다. 상황 파악이 안 되면 주제 파악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모두가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더 잘난 사람들이 널려 있다. 자신은 선이고 나머지는 악이라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면 없던 여유가 묻어난다.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법이다. 살았던 날들이 모여 길이 되고 인생이 된다. 뿌린다고 다 열매가 아니듯, 열심히 산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떳떳하게 살았다는 마음의 훈장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착하면 고민과 번뇌가 커지지만 돌아서면 그만이다. 삶이 그렇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경우가 제법 있지만 멀리서 보면 거의 희극이다. 세월은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말도 안 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과거와 화해하면, 과거가 현재를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폴 발레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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