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한지

  • 남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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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2   |  발행일 2017-12-02 제23면   |  수정 2017-12-02

필자가 아는 어느 한국화가는 꼭 문경한지를 구입해 작품을 그린다. 붓을 터치하는 느낌이 좋고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질감이 잘 맞는 데다 보존성까지 뛰어나기 때문이란다. 한지(韓紙)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순수한 한국 종이를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당지(唐紙), 서양의 양지(洋紙)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전통 한지의 우수성은 여러 번 입증됐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신라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1천300여년을 견뎠다. 현대의 종이 수명이 100년 남짓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려 팔만대장경의 일부도 850년 동안 보존되고 있다.

서양의 양지인 현대 종이의 등장과 함께 전통 한지는 급속히 사라져 갔다. 조선 초기 지장(紙匠)의 수는 700여명이고 그중 닥나무가 많았던 경상도에 260여명이 몰려 있었다. 문경에는 1970년대까지 지소(紙所)가 20여곳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료인 닥나무가 잘 자라고 품질이 뛰어난 덕이었다. 하지만 제조과정이 힘들고 수입 원자재를 이용한 변형된 한지의 유통 등으로 전통한지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졌다.

3대를 전승한 경북도무형문화재 문경한지장 보유자 김삼식씨는 60여년간 전통한지 생산에 매달려온 인물이다. 토종 닥나무를 심고 채취하는 것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는 한지는 문경한지가 유일하다. 김씨가 만든 한지는 조선왕조실록·고려초조대장경 복간본 작업과 최대의 한글 서예작업으로 꼽히는 문경시의 아리랑 일만수 쓰기에도 사용됐다.

문화재 복원용 데이터베이스 표준 종이로 문경한지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최근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에게 문경한지의 제조과정을 밝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영국이나 이탈리아 등에서도 고문헌과 명화의 보수지로 우리나라 한지를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지는 글을 기록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용도 외에도 생활 공예나 옷, 절연지, 스피커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제조과정의 특성상 가격이 다소 비싸다. 하지만 한지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우리의 문화로 정착시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남정현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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