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20>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청송 파천면 덕천리의 경의재·요동재사·소류정·벽절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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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2   |  발행일 2017-11-22 제13면   |  수정 2021-06-21 17:30
“나라 망하고 임금 잃었으니 고향으로 가라” 고려충신 600년 유훈 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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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경의재는 악은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이다. 경의재는 1982년 준공된 최근의 건물로, 넓은 경내와 잘 손질된 조경 덕분에 깔끔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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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재사는 청송심씨 12세손인 심응겸이 공부하고 쉬던 곳으로 ‘요동’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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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청송지역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 심성지의 정자 소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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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절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벽절 심청을 기리는 정자로 심청은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

 

‘나의 입산일(入山日)을 내가 죽은 날(死日)로 하라.’ 그날은, 고려 말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짓고 글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 심원부의 후손들이 그의 유훈을 받들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1400년대를 전후한 때라 짐작된다. 그 후 지금까지 심원부의 후손들이 이곳에 산다.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 덕천리다.

악은 심원부의 위패 모시는 ‘경의재’
이성계 역성혁명에 등 돌린 선조의 뜻
후손들이 받드는 청송심씨 집안 재실

중국의 요임금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
요동재사, 청송심씨 12세손 심응겸 재사

덕천마을 남쪽끝 산밭에 둘러싸인 소류정
구한말 의병대장 심성지가 공부하던 곳

벽절정, 벽절 심청의 정자로 원래는 구송정
부친상 당한후 벼슬길 단념하고 학문 전념
임란 나자 의병 일으켜 경주·울산서 戰功


 

#1.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 ‘경의재’

용전천을 가로지르는 덕천교를 건너고 덕천을 가로지르는 경의교를 건너면, 덕천마을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한 자리에 경의재(景義齋)가 자리한다. 악은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이다. 솟을대문과 높은 담장 위로 솟은 육중한 팔작지붕이 보인다. 대문간 아래에는 맞배지붕을 올린 신도비각이 자리한다. 제법 규모가 있는 관리사는 경의재 경역의 왼쪽에 담장과 협문으로 구획되어 있다.

경의재는 정면 6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 왼쪽 2칸과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오른쪽 마지막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대청방과 같이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은 난간 없는 툇마루다. 경의재 오른쪽에는 심원부와 아들 천윤(天潤), 손자 효상(孝尙) 등 삼대(三代)의 제단비가 세워져 있는데, 누마루형식의 방은 이 제단비를 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의재는 1976년 12월 재실 건립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공사를 시작해 1982년에 준공되었다. 가문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최근의 건물이다.

넓은 경내, 잘 손질된 조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간이다. 경의재로 오르는 계단은 어칸을 피해 놓여 있고 각 칸 툇마루 아래에는 디딤돌이 정연하다. 강직한 기둥들은 나무의 민낯 그대로 결렴하게 늙어가는 색조다. 단순하면서도 청검한 입면이다. 네그루의 향나무가 경의재 앞을 호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충(忠)과 경(敬)자를 새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충성과 공경, 그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영원한 새김일 게다.

#2. 청송심씨 12세손 심응겸이 공부하던 ‘요동재사’

경의재 앞 벚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면 마을이 열린다. 마을 한가운데 땅은 논이 차지했고 기와지붕을 인 집들은 낮은 산에 기대 있다. 논의 가장자리를 따라 뒷산에서 내려오는 좁장한 물줄기가 흐른다. ‘요골등천’이다. 물길 따라 고샅길로 들면 산 아래에 요동재사(堯洞齋舍)가 자리한다. 청송심씨 12세손인 심응겸(沈應謙)이 공부하고 쉬던 곳이다. 요(堯)는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롭기가 신 같았다는 옛 중국의 군주다. ‘요동’이란 요임금과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재사의 뒷산도 요동이라 부르는데 선조를 모신 선산이라 한다. 재사에서 바라보이는 먼 산마루는 도치동이라 하는데 그곳도 선조를 모신 선산이다. 심응겸이 쉬고 공부하던 집은 이후 선산을 바라보고 지키고 봉향하는 재사가 된 것이다. 건물은 많이 훼손된 것을 1890년에 수리했고, 이후 2003년 유교문화권사업에 의해 해체 보수되었다. 그러나 다시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적이 낡은 모습이다.

요동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집이다. 가운데는 대청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를 깔아 전체 ‘ㄱ’자 형의 널찍한 마루로 구성했다. 툇마루 측면에는 벽을 세워 판문을 달았다. 오른쪽 방은 통 2칸의 온돌방이다. 왼쪽방의 측면, 대청의 후면, 오른쪽 방의 측면과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양쪽 방 모두에 벽장을 달아 협소한 공간을 늘렸고 대청에는 선반이 달려 있어 생활의 흔적이 역력하다. 주사로 보이는 4칸 집은 현재 퇴락한 채로 비어 있다. ‘이 집에 올라 묘소를 바라보며 마음을 의지하며…. 선훈을 지키고 후손에 덕을 베푼 지 오래라 가히 장래가 영원할지라’는 기문이 쓰인 지는 이미 1세기가 지났다.



#3. 의병장 심성지가 학문 연구하던 ‘소류정’

덕천 마을의 남쪽 끝에 산과 밭으로 둘러싸인 소류정(小流亭)이 자리한다. 914번 지방도 건너편의 한가로운 자리라 덕천마을과는 한 걸음 떨어진 적적한 감이 있다. 소류정은 구한말 청송지역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少流) 심성지(沈誠之)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1885년에 최초창건(안내판 내용, 문화재등록을 위한 문화재위원 조사보고서에는 1896년 초창) 이후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 원형대로 중건했다.

밭 사이로 난 하얀 시멘트 길을 오른다. 길 양쪽에 작고 동그란 향나무들이 공경의 마음으로 서있다. 비탈길 위 낮은 산 아래 심성지를 기리는 커다란 사적비가 보인다. 검은 오석의 비신에 건너편의 산과 하늘이 비친다. 그 옆에 세 개의 작은 비가 나란하다. 심성지의 훈장증, 아들 능찬의 표장증, 증손 상기의 무공훈장증이 역시 오석에 새겨져 있다. 3대에 걸친 의로움이 차갑게 반짝거린다.

소류정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좁은 공간이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건물이다. 전면 2칸은 툇마루로 정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고 측면에 판문을 설치해 폐쇄적인 구조를 갖췄다. 그리고 툇마루 바깥쪽으로 쪽마루를 둘러 문을 열었을 때보다 너른 마루와 개방성을 확보하도록 했다. 후면의 2칸은 온돌방으로 측면에 문, 뒷면에 창을 내었다. 촘촘하게 구성된 지극히 소박한 건물이다. 그는 의병해산령 이후 이곳에서 지내다 1904년 생을 마쳤다고 한다. 뿌리의 근저에서 근본을 이어간 이 집에 부드럽고도 정정한 기백이 넘친다.



#4. 벽절 심청의 정자 ‘벽절정’

덕천마을이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앞산, 현당산(峴堂山)이다. 선조의 선산이라는 도치동이 바로 이곳으로 벽절(碧節) 심청(沈淸)과 그의 부친인 도곡(道谷) 심학령(沈鶴齡), 증조부인 월헌(月軒) 심손(沈遜)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송읍 덕리에 속하지만 청송심씨들에게 이 산은 마을과 하나다.

그 산의 동쪽 기슭 절벽에 용전천을 바라보며 벽절 심청의 정자 벽절정(碧節亭)이 서있다. 원래 이름은 구송정(九松亭)이었다. 벽절 심청은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당한 이후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집 뒤에 정자를 짓고 아홉 그루 소나무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킨다. 경주, 울산 등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고 1594년에는 훈련원봉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의 도산(島山: 울산)싸움에서 전사했다. 종군했던 장자 응락(應洛)이 진중에서 말가죽으로 시신을 거두어 도치골 구송정 오른쪽 기슭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벽절은 선조 임금이 내린 호다. 그에 따라 정자의 이름도 벽절이 되었다. 겨울철에도 소나무는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벽절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다. 경의재와 매우 흡사한 인상이다. 임진왜란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몇 차례 소실된 것을 1919년 중건했다고 한다. 기와를 올린 낮은 돌담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5칸의 관리사가 1동 있다. 주변은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용전천은 아래에서 흐르고 청송읍이 남쪽에 환하며 정면에는 청송의 진산인 방광산이 솟아 있다. 넓고 너른 시야 속에서 벽절정은 고조된 정적으로 자리한다. 청송의 하 많은 정자가 품은 뜻이 곧 벽절이 아닐는지.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공동기획:청송군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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