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9> ‘조상의 선행과 그 뜻이 담긴’…청송 파천면의 담포정·기곡재사·귀래정·학산정

  • 박관영
  • |
  • 입력 2017-11-15   |  발행일 2017-11-15 제11면   |  수정 2021-06-21 17:29
사과밭이 병풍처럼 둘러선 담포정, 선조의 욕심 없고 깨끗한 마음 기려
20171115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자리한 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

 

 

용전천(龍纏川)은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서 발원해 청송읍을 지나 파천면을 관통한다. 청송군 내에서 유로 연장과 유역면적이 가장 큰 천이다. 옛날에는 파천(巴川) 혹은 파질천(巴叱川)이라 했다. 뱀처럼 용처럼 흐르는 천이다. 파천면은 천의 이름에서 온 지명이다. 신기리의 신기천, 덕천리의 덕천 역시 땅과 천이 하나다. 고대로부터 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터전은 하나였다. 강물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영원히 움직이면서 단단한 지반을 만들어준다.

#1. 평해황씨의 담포정

황광혁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어부가 큰 자라를 잡아 나뭇가지에 달아 놓은 것을 보게 된 그는 측은한 마음에 자라를 사서 살려 주었다. 자라는 물 위를 떠가며 세 번 돌아보고는 사라졌다. 그날 밤 그의 꿈에 한 소년이 나타나 말한다. 넓은 갯가에 ‘황아무개 소유의 토지’라고 쓴 표목을 많이 세워두라. 이상히 여기면서도 그는 소년의 말을 따랐다. 이튿날 마을에는 큰비가 내렸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갔으나 그가 세운 표목만은 온전히 서있었다. 그 자리를 논과 밭으로 개간해 씨 뿌리고 추수하니 늘 풍년이었다. 그곳이 파천면 신기리(新基里)다.

중태산 자락에서 발원한 신기천이 신기리를 관통해 용전천과 만나는 합류점의 남쪽에 본 마을인 새터가 자리한다. 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를 살리고 얻게 된 천변의 땅이다. 이후 후손들은 70~80여 호를 이루며 번성하게 되는데, 선조의 선행으로 얻은 땅에 그 뜻을 기려 세운 것이 담포정(澹圃亭)이다. 담포란, 담박한 밭이다. 욕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으로 얻은 터전을 뜻할 것이다.


신기천과 용전천 합류점 남쪽 새터 마을
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 살리고 얻은 땅
담포정은 후손들이 선조 선행 기려 세워

기곡재사,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
시조 이석의 묘 관리·祭 지내려 세운 재사
바람 잔잔한 산속…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

가선대부중추부사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
귀래정 앞 진사 류응목 정자 학산정 자리
촘촘한 문살…고독이 음영처럼 드리운 모습



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黃一聖)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처음에는 서당으로 지어 후진을 키웠는데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강압으로 서당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정자로 바꾸어 담포정이라 편액했다. 이후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 그러나 갯가의 땅이라 지반이 약했던 탓인지 건물이 기우는 등의 문제가 생겼고 1962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자가 또다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회의를 통해 2007년 다시 중건했다.

새터마을 안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사과밭을 병풍 세운 담포정이 보인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나지막하고 마당은 넓어 정자는 온전히 드러나 있다. 담은 마을길과 평행하지 않고 5도 정도 마을 입구 쪽 혹은 북동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대문도 정자도 같은 방향이다. 뒤돌아보니 소위 문필봉이라 부를 만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정자는 봉우리 쪽을 향해 있다.

담포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정면에 반칸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의 들어열개 위에는 광창을 냈다. 담포정은 사용할 수 있는 고재가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새로운 목재를 사용했다 한다. 마당에는 깬 돌을 깔고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한쪽에는 2007년 중건 후 세운 비석이 있다. 마루 난간의 치마널이 거의 지면에 닿을 듯해 멀찍이 보면 땅속으로 쑥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물 위에 뜬 배 같기도 하다. 기단의 정면 가운데에 묘한 바윗돌이 있다. 자라의 머리인가? 어쩌면 자라가 돌아와 담포정을 업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0171115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
 

#2.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 

 

새터에서 북동쪽으로 1㎞쯤 가면 신기천 너머에 신기2리 감곡(甘谷)마을이 있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라 해서 ‘가람실’이라 불렸다. 감곡교를 건너면 아름다운 마을 숲 앞 갈림길에 기곡재사(岐谷齋舍) 이정표와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묘 입구’ 표석이 있다. 기곡의 뜻대로 갈림길에서 골짜기로 든다. 설마 이러한 해석이 옳지는 않겠지만 길은 맞다. 골짜기는 온통 사과밭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라디오 소리 우렁차다. 적적함을 달래는가 싶었는데 새를 쫓는 것이란다.

골짜기 길 끝에 재사가 자리한다. 기곡재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상이자 진성이씨의 시조인 이석(李碩)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사다. 원래 있었던 재암과 1740년에 중건한 것은 소실되었고 185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했다. 재사의 입구 오른쪽 앞에 3칸 초가지붕 건물이 있다. 왼쪽 칸은 아래 벽이 개방되어 있는 방앗간, 가운데 칸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오른쪽 칸은 온돌방이다. 옛날 주사가 아닌가 싶다.

기곡재사는 정면이 다락집 형상인데 전체적으로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이다. 문을 열면 정면으로 대청이 보인다. 누하주는 팔각기둥, 누상주는 둥근기둥을 세운 높고 넓은 마루다. 양쪽으로 익사가 연결되는데 누마루보다 조금 낮다. 앞쪽에 좁은 쪽마루를 달아내어 대청으로 오르는 작은 계단 한 단을 설치했다. 계단과 대청 입구가 부드럽게 마모되어 있어 잦고 신중한 걸음을 떠올리게 한다. 우익사에는 노년층이 사용하는 윗방을 꾸미고, 좌익사에는 장년층이 사용하는 중간방을 배치했다고 한다. 서열에 따른 용도의 구분이다.

현판은 대청을 마주 보는 방 위에 걸려 있다. 툇마루 아래 신발이 많은 걸 보니 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이다. 다락집 형식이라 가운데 마당이 깊다. 좁은 기단과 툇마루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중심 잡히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일 수밖에 없다. 재사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작은 핑크색 자전거가 담벼락에 기대있고 핑크색 아기의자가 초가 기단 위 볕 좋은 자리에서 산과 밭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도 잠잠한 산속, 안온하다.


20171115
가선대부중추부사를 지낸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
20171115
동학농민운동 때 의병 선봉에 섰던 진사 류응목의 정자 학산정.
 

#3. 아산장씨의 귀래정과 하회류씨의 학산정
 

보광산에서 발원한 덕천(德川)이 용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서쪽에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덕천리가 자리한다. 덕천 가에 있어서 덕천리다. 마을은 만석꾼 송소 심호택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으로 이름나 있으나 여러 성씨의 역사가 어우러져 있기도 하다. 덕천이 용전천과 만나기 전, 서쪽에서 흘러온 좁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는 자리에 그들의 옛 시간이 있다.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정자 귀래정(歸來亭)과 하회류씨(河回柳氏)의 정자 학산정(鶴山亭)이다.

귀래정은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를 지낸 장입국(蔣入國)의 정자다. 원래 의성 원유동(元儒洞)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증손이 의성에서 덕천마을로 이거해 살면서 선조의 정자를 옮겨 와 중건할 마음을 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38년이 되어서야 귀래정은 후손에 의해 후손들 곁에 세워졌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방과 왼쪽 온돌방 앞에만 난간이 없는 툇마루를 두고 측면에 판문과 고창을 설치했다. 오른쪽 방은 통 온돌방으로 정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산 아래 높직한 자리다.

귀래정 앞에는 진사 류응목(柳膺睦)의 정자 학산정이 자리한다. 그는 고종 때인 19세기 중후반의 인물로 대단히 우수한 문재였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그는 유력가의 수세에 밀려 귀향한 후 농사짓고 글 읽으며 지냈는데 출세의 권고에 밀려 몇몇 곳을 전전했다 한다. 그가 마지막에 자리한 곳이 덕천리다. 그는 학산정을 짓고 먼 데서 혹은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많은 이름난 선비들과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의 선봉에 섰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비분강개로 여생을 마쳤다. 팔작지붕을 얹은 4칸 학산정은 옛 멋은 없다. 촘촘한 문살은 앙다문 입매 같고, 바짝 에워 선 담장은 타협 없는 몸짓 같다. 단단한 고독이 음영처럼 드러나 있는 정자다. 그는 학산정기에 ‘가까운 물 먼 산은 다정을 보낸 듯 읍하며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때때로 평온했을 것이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 : 청송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