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환란 20년, 위기는 진행형이다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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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3   |  발행일 2017-11-13 제31면   |  수정 2017-11-13
[월요칼럼] 환란 20년, 위기는 진행형이다
배재석 논설위원

오는 21일은 19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아시아에 몰아친 금융위기가 한국호(號)를 덮치면서 순식간에 외환보유고가 39억달러까지 떨어졌다. 국가신용등급도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해 하루아침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한보그룹에 이어 삼미·진로·대우 등 내로라하는 대표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한국경제의 불문율이던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도 깨졌다. 개혁은 뒤로한 채 무리한 차입경영에만 몰두하다 속살이 곪아터진 결과였다. 대동·동화은행 등 5개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외환위기가 남긴 트라우마와 상처는 깊고도 강했다. 왜란(倭亂)·호란(胡亂)에 비유해 환란(換亂)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의 삶에 끼친 파장은 혹독했다. 한 일간지가 지난해 성인남녀 1천11명에게 내 인생을 바꾼 사건이 무엇인지 물은 결과 ‘외환위기’(18.5%)를 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외환위기는 경제적 충격만이 아니라 심리적·정서적 충격이 국민의 삶 전체를 뒤흔들었다”고 회고한 것도 그만큼 그늘이 깊었다는 반증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다. 희망퇴직·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졸지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가장이 넘쳐났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선택도 잇따랐다. 이 같은 세태를 대변하듯 이태백·삼팔선·사오정·오륙도 등 직장인의 처지를 풍자하는 신조어도 쏟아졌다. 더 안타까운 것은 30∼40대 한창 일할 나이에 회사에서 쫓겨난 직장인들은 지금까지도 안정적인 삶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 여파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된 것도 외환위기 사태가 낳은 어두운 자화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졌고, 상위 1%인 50만명이 우리나라 부의 25.9%를 독차지하는 기형적인 세상이 됐다. 계층 이동 희망사다리도 무너져 금수저·흙수저, 헬조선 등 비관적인 담론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기업 등의 사내보유금이 무려 75조원인 반면 가계부채는 1천400조원에 달하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외환위기 이후 강산이 두 번 바뀌면서 겉으로 드러난 경제 기상도는 쾌청해 보인다. 97년 말 204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이 지난달 말 3천845억달러까지 불어났다. 투기등급인 B+까지 떨어졌던 신용등급은 11단계나 상승, AA를 기록하고 있다. 경상수지도 98년 이후 19년 연속 흑자기조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곳곳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우선 저출산·고령화가 고착화되면서 90년대 7%였던 잠재성장률이 최근 2%대로 추락했다. 1천400조원 가계 빚과 공공·노동 등 미완의 구조개혁도 여전히 우리 경제의 뇌관이다. 재정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새 정부의 복지 포퓰리즘과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반(反)기업정책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21개월 연속 두자릿수 증가율을 이어가고 있는 수출도 사실은 1997년처럼 반도체 착시효과다.

“한국경제는 지금 뜨거운 냄비 안에 들어있는 개구리다. 5년 이내에 냄비에서 뛰쳐나가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것이다.” 지난 3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국내 경제전문가 489명을 설문조사해 내놓은 섬뜩한 경고다. 다가오는 주변 환경변화를 제때 인식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우리경제가 제2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20년 전 그때도 위기는 소리 없이 우리를 덮쳤다. 정부와 정치권이 적폐청산에만 매달려 경고음을 듣지 못하고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저출산 극복과 규제개혁으로 성장동력을 회복하고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는 일이 과거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은 말만하고 행동은 없는 ‘NATO(No Action Talk Only) 국가’라는 20년 전 쓴소리를 다시 들어서는 안될 일이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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