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10] 정통성리학의 거목 ‘김숙자(金叔滋)’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11-13   |  발행일 2017-11-13 제13면   |  수정 2017-11-20
“진실로 백성 위한다면 무엇이 두려울까” 오로지 백성 위한 삶
20171113
김숙자를 배향하고 있는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낙봉서원.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지만,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됐다. 그 후 1933년에 강당, 43년에 외삼문을 새로 지었다. 1977년 들어 사당을 짓고 89년에는 동재를, 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세웠다. <영남일보 DB>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길재의 정통성리학의 맥을 이은 인재로 영남사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꼽힌다. 김숙자 역시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장원방 출신으로,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목민관으로 나아가서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존경을 받았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신념이 강해 명성을 떨쳤다. 실제 조선초 숭유억불 정책에 솔선수범해야 할 왕실이 되레 불교를 숭배하고 있는 것을 두고 이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김숙자의 올곧은 신념은 훗날 영남사림의 기반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786년에는 김숙자를 배향하는 낙봉서원에 편액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후학들이 얼마나 그를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 걸출한 인물의 탄생

20171113
정조실록 22권, 정조10년 10월 28일 무진 두번째기사. 유생들이 김숙자를 배향한 낙봉서원에 편액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1389년 고려조였다. 창왕(昌王)에서 공양왕(恭讓王)으로 임금이 바뀌는 어수선한 시국에 선산 영봉리에 살고 있던 진사 김관(金琯)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다. 바로 김숙자(金叔滋)였다. 김숙자는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의외로 공부 시작은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며 막 글을 읽기 시작한 때가 9세였다. 대신 학문을 습득하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길재의 정통성리학 맥 이은 강호 김숙자
영남사림의 기틀 마련한 인물로 손 꼽혀
고령현감·개령현감 등 목민관으로 활약
자연재해 생기면 반찬 줄여 고통 함께…
흉년 든 해에는 창고 열어 군량 내어줘

조선초 성리학 올바른 확립·실천 노력
왕실의 불교 숭배 두 번이나 지적 상소



천성적으로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고 아버지 김관이 공도 들였지만,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였다. 한 번 나가서 놀기 시작하면 공부고 뭐고 다 잊게 마련이었다. 한동안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하자, 결국 아버지 김관이 회초리를 들고야 말았다. 김숙자는 서러웠다. ‘이게 다 서책 때문이야’ 싶은 어린 마음에 책을 들고 나가선 숲을 향해 던져버렸다. 그러곤 돌아서는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는 바람에 펄럭이는 책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이 약해진 김숙자는 숲으로 들어가 다시 그 책을 주워 집으로 돌아갔다. 엉망이 된 꼴로 돌아온 김숙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가 손자의 작은 등을 어루만지며 칭찬해주었다.

성장할수록 학문에 대한 김숙자의 욕심은 커져갔다. 12세가 되면서 길재(吉再)의 문하로 들어가 소학과 경서를 배운 것도 그 맥락에서였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갈급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당시의 이름난 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상은 역학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이에 김숙자는 지체를 두지 않고 충청도로 향했다. 그리고 윤상 곁에서 주역(周易)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김숙자는 세상의 이치에 두루두루 밝아져갔다. 이젠 관료로 향하는 문을 열 때가 된 것이다. 김숙자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1414년(태종 14), 김숙자는 갑오식년시(甲午式年試)에서 2등으로 생원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419년(세종 1) 기해년에 대과에 도전했다. 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치러진 증광시(增廣試) 기해1년방(己亥一年榜)이었다. 시험은 그해 3월29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치러졌다. 엿새 뒤인 4월4일에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김숙자가 병과(兵科) 1등, 즉 장원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영봉리가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2. 이상적인 목민관

김숙자는 여러 지역에서 목민관으로 활약했다. 그 중 가장 굵직한 행적이 1442년에 부임한 고령현감(高靈縣監)과 1449년에 부임한 개령현감(開寧縣監, 현 김천)이었다. 그런데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동안 김숙자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학문을 실천하는 길이 정치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토지가 있고 백성이 있으니, 여기서도 나의 학문을 능히 실천에 옮길 수 있지 않은가.”

실제 김숙자는 자신의 명예보다는 백성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아끼지 않고 펼쳤다. 그가 목민관으로서 한 일은 다양했다. 종자가 떨어져 곤란한 자에게는 종자를 꾸어주었고, 양식이 떨어진 자에게는 곡식을 빌려주었다. 또한 관청의 빈 땅에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종자를 채취해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부지런한 사람은 칭찬하고 위로하며, 게으른 사람은 훈계하고 징계하였다. 특히 흉년이 든 해에는 창고를 열고 군량을 모두 내어 굶주린 주민들을 살리기도 했다. 자칫하면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김숙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실로 백성에게 마음을 둔다면 법이 말린다 한들 내 무엇이 두렵겠는가.”

뿐만 아니었다. 자연재해가 생기면 먹는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했고, 옥에 있는 죄수들 가운데 죄질이 가벼운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세금을 무리하게 걷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경계하였고, 노인이나 환자, 고아들을 주의 깊게 보살폈으며, 혼인 시기를 놓친 이들은 재량껏 도와주었다. 당연히 마을이 평온할 수밖에 없었다. 김숙자에 대한 주민들의 존경과 사모의 정이 날로 커져갔다. 기록에 의하면 “풍속이 자연히 부드러워지고 도적이 자취를 감추는 등 인근 10여 고을이 모두 그 혜택을 입었다. 김숙자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잊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3. 척불(斥佛) 그리고 성리학에 대한 집념

김숙자가 활동한 시기는 여말선초로 억불숭유, 즉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다.

김숙자는 “성리학의 올바른 확립과 실천이야말로 새로운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불교의 위세와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었다. 특히 솔선수범해야 할 왕실의 불교 숭배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의 불교가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는 사실이었다. 김숙자는 이를 지적한 글을 지어 상소로 올렸다. 바로 1431년(세종 23)의 ‘척불소(斥佛疏)’였다.

“불도는 성인의 도가 아닙니다.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중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사를 통해 복을 받기는커녕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고 근심걱정이 외려 많아진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낮에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모여 놀고, 밤에는 풍기문란한 짓들도 합니다. 뿐이겠습니까. 나라에 재해가 들면 백성들은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데, 저 중들은 때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주려죽는 백성은 있어도 주려죽는 중은 없다는 말이 다 있겠습니까. 교만하고 방자한 무리들입니다. 배척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자, 1437년(세종 29)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두 번째라 하여 ‘척불재소(斥佛再疏)’였다.

“불도의 해악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인심을 파괴하고 강상(綱常)을 파멸시킵니다. 예컨대 일하지 않고 놀고먹습니다.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처지에 세금도 내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니, 반드시 물리쳐야만 합니다.”

두 상소 모두 백성의 안위가 핵심이었다.

불교에 대한 확고한 입장말고도 김숙자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데 있어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다. 1431년(세종 13)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했을 때, 모든 의식을 주자의 예에 따라 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당시에는 선비 집안에서도 불가의 장례법을 따르곤 했는데, 그런 풍속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울러 장사를 지낸 후에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채로 시묘살이를 하면서 집에 들르지 않았다. 형식이 아니라 지극한 효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음은 물론이었다.

제자들에 대한 교육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공부에도 순서가 있다. 각 과정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때문이다. 처음은 ‘동몽수지’의 ‘유학자설정속편’을 암송하라. 다음은 ‘소학’이고, 그런 후에야 ‘효경’ ‘사서오경’ ‘자치통감’ ‘제자백가’인 것이다. 또한 무슨 책이든 정독을 해야 한다.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제자들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김숙자가 낳은 제자들이 훗날의 영남사림을 완성한 것을 보면, 김숙자가 미친 영향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4. 후세로부터의 존경과 공경

영남사림의 거두가 된 아들 김종직이 아버지 김숙자에 대해 한 자 한 자 적어갔다.

“타고난 성품이 자상하고 단정하였으며 범사를 법도에 의거했다. 어버이를 효도로써 받들고 향리에는 공경으로 대하였다. 관직은 청렴으로 지키고, 벗과는 믿음으로 사귀었다. 나아가 절개가 깊어 굴하며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60여년 동안 그 행실에 흠결이 없었다.”

하지만 속상한 점도 있었다. 바로 이혼으로 인한 마음고생이었다. 과거 급제 전, 김숙자는 할아버지 김은유의 뜻에 따라 한변(韓變)의 딸과 혼인을 했었다. 그런데 훗날 한변의 신분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대노한 아버지 김관이 이혼을 주도했다. 그 일은 김숙자에게 상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나아갈 적마다 번번이 발목을 잡고는 했다.

그럼에도 김숙자는 김숙자였다. 1456년(세조 2),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밀양의 처가로 내려간 김숙자는 그곳에서도 폭넓게 공경을 받았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는 뜻에서 ‘달존(達尊)’이라 불렸을 정도였다. 죽은 후에도 우러름을 받아서, 1489년(성종 20)과 1845년(헌종 11),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으로 추증되었다.

성리학 정신에 따라 철두철미한 인생을 살아온 김숙자를 후세들도 인정했다. 1786년(정조 10) 10월28일, 유생들이 한데 모여 김숙자의 서원에 편액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선산(善山)에 낙봉서원(洛峯書院)을 세워 김숙자를 제사 지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를 모신 사당에 아직까지도 편액을 하사받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김숙자가 누구입니까. 영남의 인재가 그의 손에서 나왔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편액을 내려주시어 그 이름을 빛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임금이 허락했다. 진실로 영원히 남을 이름, 김숙자였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강호선생일기, 이준록,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