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혁의 남자의 취미] 사라지는 시간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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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0   |  발행일 2017-11-10 제39면   |  수정 2017-11-10
기억할 수 없다면 기록하라
20171110
기록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시간을 간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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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가방에 늘 두세 권의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스케줄 관리, 메모 , 떠오르는 단상에 대한 기록 등 언제든 적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영화를 보러 갔다. 원작부터 매혹적으로 빠져들었던지라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개봉 당일, 서둘러 영화관을 찾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물을 만났고, 감독의 연출력도 모난 부분이 없었다. 오랜만에 원작에 버금가는 영화를 만난 듯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영화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째 남 일 같지 않아서다. 알츠하이머병보다는 알코올성 치매에 가깝겠지만, 요즘 자주 깜빡한다. 40대를 넘어서며 급격히 추락하는 기억력은 날개를 잃었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행주를 한참이나 찾았다는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 이대로 망각의 늪에 빠질 것인가?
중년 남자 이야기, 이번 주제는 기록에 관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 기록이란 하나의 취향으로 볼 수 있다. 경험한 것들을 꼼꼼히 적는 것, 떠오르는 발상을 메모하는 습관 등은 자연스레 형성된 자아와도 같다. 하나 중년을 넘어서면 기록은 이제부터 생존의 한 방식이다.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시간들, 기억할 수 없다면 기록하라.

필자가 선호하는 기록의 방식은 크게 글과 사진으로 나뉜다. 먼저 글로 남기는 기록에 대해 몇 글자 적어본다. 짧은 메모부터 일기와 수필까지 글로 표현하는 모든 것이 기록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오늘 오후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을 수첩에 적어두거나, 어제 저녁때 만난 친구와의 대화 내용 중 인상 깊은 대목을 적으면 그것이 기록이다. 계획적인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지난 삶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 기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마흔 넘어서며 뚝뚝 떨어지는 기억력
이대로 망각의 늪에 빠질 것인가 기로
생존의 한 방식으로 기록 필요성 절감

무개념 캠핑족 고하려 적었던 내 메모
글쓰기 출발이자 아이들과 첫 캠핑 역사
사진도 소중한 이와 나눈 시간의 흔적
이제 당신의 자취와 사랑을 기록할 때


필자가 글쓰기를 시작한 계기도 작은 메모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캠핑장에 갔다. 자연을 벗 삼아 힐링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새벽까지 떠들고 노래하는 취객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개념을 상실한 캠핑족들을 고해바치리라 이를 악물었다. 랜턴 불빛 아래에서 종이상자 위에 당시의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었다. 며칠 후, 그 메모는 모 인터넷 신문의 톱기사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날, 울분을 삭이며 귀를 막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면 독자 여러분과 지면상에서의 조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로 어디에 가든 수첩과 필기구는 반드시 챙긴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좋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의 소감 등을 간략히 적어둔다. 그러한 메모들은 좋은 글 소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나의 역사가 된다.

단순 메모 외에도 일기처럼 적는 다이어리나 요즘 장안의 화제인 가계부를 적는 것도 추천할 만한 기록방법이다. 시중에는 10년을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도 나와 있는데, 자신이 1년 전 혹은 10년 전에 했던 행동과 생각들을 어제 일처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다. 경제관념을 재정립하고 본인의 씀씀이를 돌아볼 수 있는 가계부의 사용은 두말할 것도 없으리라.

두 번째 기록의 방법은 사진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요즘은 언제 어디서든 고화질의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 굳이 전문가용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의 풍광이나 개인의 자태를 작품사진처럼 남길 수 있는 시대다. 글이라면 선천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에게 사진은 매우 훌륭한 대안이 된다.

유명한 관광지나 소문난 음식점에 가면 누구나 스마트폰을 꺼내 열렬히 찍어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 멋진 음식이 내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면 어떻게든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옛말(?)에도 남는 건 사진뿐이라 하지 않던가. 물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만, 그 모든 것을 담아두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 협소할 따름이다.

음식이 다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젊은 친구들을 넓은 아량으로 바라보자. 그들에게 사진은 기록의 차원을 넘어선 문화의 영역이다. 처음엔 좀 어색할 수 있지만 셀카도 자꾸 찍다 보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찍는 역할에 충실해서 늘 가족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시대적 아버지의 틀을 버리자. 형식을 포기하면 생각은 더욱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사진을 무한정 찍는 것만으로 기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낚아 올린 기억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 사진 중에 간직할 만한 것들은 출력을 하거나 현상을 해서 따로 사진첩에 정리한다. 너무 귀찮다고 생각되면 컴퓨터에 목록별로 저장해두는 것도 괜찮다. 그마저도 부담이 된다면 SNS에 사진과 함께 간략한 글을 올려본다. 소통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소중한 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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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록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끔 자랐다. 일기를 검사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나? 기행문도 늘 숙제의 일환이었고, 무언가를 끄적거릴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는 게 영 어색하고 낯설다. 그렇게 세뇌당한 채 중년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유한할뿐더러 쏜살같고, 기록하지 않은 시간은 사라질 뿐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인생,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두고 싶거든 이제 기록을 시작하자. 후세에 길이 회자될 위인들만 자취를 남기는 건 아니다. 역사를 채워 나갔던 건 민초들의 삶이 아니던가. 인류가 멸망하여 모든 기록물이 사라졌을 때, 당신이 장독에 넣어 묻어 두었던 기록들이 신(新)인류에게는 문명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고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는가?

36년간 군대에서 쓴 일기를 국가기록원에서 인정받은 ‘기록하는 인간’의 저자 정대용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기는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만 할 때, 당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 당신의 사랑을 기록할 때다.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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