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8>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뜻’…청송군 진보면의 풍호정·약산정·율간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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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8   |  발행일 2017-11-08 제15면   |  수정 2021-06-21 17:27
流水와 솔바람 벗삼아 선 풍호정…유유자적의 즐거움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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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진보면 반변천변에 자리한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 시조인 신숭겸의 후손 풍호 신지의 정자다. 신지는 세조 때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청송에서 만년을 보냈다.

 

반변천(半邊川)은 청송군 진보면 소재지를 지나 합강리(合江里)에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둥근 소리굽쇠 모양으로 흐른다. ‘합강’이란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강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북쪽 부곡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세천(細川)이 반변천과 하나 될 뿐이다. 합강리는 1984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다는데 그때 물길의 형세가 변했던 걸까. 그러나 1945년에 지어졌다는 합강동 노래에 ‘합강이 회룡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급하게 휘어진 굽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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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수령의 풍호정 소나무
 

#1. 합강리의 풍호정 

 

진보면소재지를 지나 안동 방향 34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반변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풍호정 휴게소가 있다. 한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을 기리는 망향비가 서 있는데 그 옆에 서면 맞은편 천변 절벽 위에 수목으로 감싸인 정자가 보인다. 섬뜩할 만치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가로 내려가 1976년에 건설했다는 합강교를 건너고, 눈부신 저습지를 양쪽에 거느린 천변 비포장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그 아름다운 것에 닿는다. 풍호정(風乎亭)이다.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손 풍호(風乎) 신지(申祉)의 정자다. 그는 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463년에는 효행과 청렴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가지 않았다. 신지는 만년에 진보로 내려와 합강 상류의 절벽을 다듬어 풍호정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즐기며 살았는데,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는 아버지 신영석(申永錫)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한다.

풍호정은 약한 경사지에 안정감 있게 서있다. 최초 건립은 1414년으로 지금의 것은 그 이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며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놓고 온돌방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전면의 마루에만 둥근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자료에서 본 편액은 푸른 바탕에 풍호정 세 글자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후손 풍호 신지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아버지 유언에
진보로 내려와 절벽 다듬어 풍호정 지어
정자 뒤편 200년된 소나무 꿋꿋이 자리

작약산 아래 부곡리 가장 위쪽 약산정
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정자
수풀에 가려졌지만 탄탄·온전한 골격

고산자락 함양오씨 세거지 율리 율간정
숙종 때 통정대부 제수받은 척암 오학문
세상 초연한 채 경서 읽으며 공부하던 곳



주변은 웅장한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 뒤편에는 200년 된 소나무가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맑은 빛으로 서있다. 나무는 150년 전 어느 겨울날 폭설로 인해 윗가지가 꺾였으나 꿋꿋하게 살아남았는데 사람들은 나무의 그러한 기개가 구한말 평산신씨 후손들의 의병정신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풍호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말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는 ‘기수는 멀고 무우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 보니 기수와 무우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더라’고 했다. 풍호정 아래에는 감돌며 굽이쳐 흘러내리는 반변천이 소(沼)를 이룬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물길을 따로 호명천(虎鳴川)이라 불렀다 한다. 휘어 흐르는 물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을까. 넓게 둘러보면 오른쪽의 먼 시선은 비봉산(飛鳳山)에 닿고 정면의 하늘 아래엔 광덕산(廣德山)이 빛난다. 왼쪽에는 작약산(芍藥山)이 솟아 있는데 그 줄기가 은근한 자태로 흘러 천 너머 눈앞에 드리워져 있다.

정자의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ㅁ’자형 주거건물이다. 정자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신지의 후손 신예남(申禮南)과 부인 민씨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있다. 지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후손들이 살아온 550년은 물속에 잠겼으나 그 시초만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기립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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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약산정
 

#2. 부곡리의 약산정 

 

풍호정에서 천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작약꽃 봉오리를 닮은 작약산 아래에 부곡리(釜谷里)입구가 열려 있다.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천이 반변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부곡교가 놓여 있고 마을 안길은 천과 나란히 골짜기를 파고들고 있다. 부곡교에서 부곡리 마을이 활짝 보인다. 마을은 보이는데 마을에서 가장 윗자리에 자리한 약산정(藥山亭)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는 대숲과 잡풀이 감춰 버렸다.

부곡리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정종 때의 진사(進士) 이조(李稠)다. 그는 송생현(청송의 옛 지명)의 감무(監務) 겸 안동진관병마절도사(安東鎭官兵馬節度使)를 지낸 인물로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는 칭송이 있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가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어조(魚鳥)의 즐거움에 반해 터를 잡은 곳이 부곡리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원주이씨 집안의 가세가 점점 쇠퇴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오언(李五彦)과 이준영(李俊永) 때에 이르러 학문과 행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약산정은 이오언, 이준영 두 사람이 지은 정자다. 그들은 집 서쪽 작은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글 읽고 거문고 타며 만년을 보냈다 한다. 담을 둘러 동산으로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약산정기가 조선 고종 23년인 1886년에 쓰인 것을 보면 정자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약산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이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1칸이 툇마루인데 양옆은 벽을 세워 판문을 달았다. 정자가 바라보고 있는 산이 마을 동쪽의 작약산이다. 정자의 이름을 약산정이라 한 것은 후손들이 작약처럼 무리 지어 성대해져서 문장과 덕이 온 나라에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담은 허물어졌으나 동산은 확연하고 연못은 보이지 않으나 천이 멀지 않다. 정자는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있지만 탄탄하고 온전한 골격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약산이라 했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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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세거지 율리의 율간정
 

#3. 율리의 율간정 

 

북향하던 반변천은 부곡교 아래에서 서쪽으로 향하다 이내 남쪽으로 굽이쳐 고산(孤山)의 서쪽 사면 아래를 깊이 흐른다. 물길의 급박한 회룡과 비봉산, 광덕산, 작약산, 그리고 풍호정의 뒷언덕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산 자락 율리에 율간정(栗澗亭)이 있다. 34번 국도에서 하고산 마을과 청송관광농원 쪽으로 가는 기곡길로 들어가야 한다. 혼자만 알고 싶은 근사한 길이다.

율리는 합강리의 자연부락으로 함양오씨(咸陽吳氏) 세거지다. 입향조는 척암(菴) 오학문(吳學文)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란 충신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현손이다. 오학문은 조선 숙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인물로 벼슬을 떠나 영양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정자 앞 천변에는 버드나무가 빽빽이 서 있어 ‘오류내’라 불렀고 밤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간이’라 불렀다 한다. 율간정은 이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200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오래 묵은 밤나무 사이에 자리했다. 정자 뒤는 밤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세상에 초연한 채 대나무 심고 꽃을 가꾸고, 스스로 고요한 가운데 경서를 읽고 사기를 강론하며 공부했다고 전한다.

옛집은 병란으로 타버렸다. 지금의 정자는 오랫동안 새 울음소리와 묵정밭의 그늘만 가득했던 터에 1957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율간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다. 시멘트 담장으로 경역을 구획하고 정면에 협문을 내었다. 정자 옆에 감나무 한 그루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밤나무 밭이 있었다는 정자 뒤에는 오씨 집안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석주 두 기가 서 있는데 밤을 잡으려는 다람쥐가 양각되어 있다. 명랑하고도 고운 마음이다. 율리에는 대대로 살아온 오씨 일가 30여 호가 여전히 살고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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