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분노조절장애 vs 분뇨조절장애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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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7   |  발행일 2017-11-07 제30면   |  수정 2017-11-07
정권 바뀌면 통과의례처럼
반복되는 분노·저주에 눈살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진정한 비정상의 정상화
[화요진단] 분노조절장애 vs 분뇨조절장애

‘어느 날 A는 4칸 규모의 뷔페식당 화장실 맨 끝칸에서 큰 볼일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옆 칸에 자리 잡은 B는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연달아 내며 배변활동에 집중했고 반대편 맨 끝에 앉아있던 C가 참다못해 욕설에 가까운 혼잣말로 ‘주의 아닌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절이 불가능했던 B는 또다시 따발총 소리를 줄기차게 냈고 화를 참지 못한 C는 더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그러자 B도 거칠게 맞받아치면서 화장실에는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아무 상관이 없었던 A는 너무 웃기면서도 살벌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찝찝한 상태로 빨리 나왔다.’

글을 올린 A는 ‘똥 싸는 소리에 빡친 분노조절장애랑 단발사격이 불가능한 분뇨조절장애가 한 판 붙었다’고 설명한 뒤 ‘희대의 빅매치’라고 그날의 상황을 마무리했다. 최근 인터넷에서 조회수가 수십만건을 기록할 정도로 많이 읽혔던 이야기의 줄거리다. 필력이 출중한 원본의 현장감을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단어 선택이나 지면 사정상 한계가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마주칠 수 있는 장면이어서 많은 공감을 얻은 듯하다.

화장실이란 공간이 그렇다. 딱히 심심해서 들르는 장소는 아니지만 누구나 찾을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다. 조금 더 급하고 덜 급한 차이를 가질 뿐 목적은 같다. 볼일을 볼 때 소음이나 악취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누가 참견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달이 나는 것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수성 아래 서로 참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분뇨조절장애가 물론 단초를 제공하긴 했지만, 사실상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음을 감안하면 분노조절장애가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우리 정서상 뭐든지 ‘정도껏’ 하면 별 탈은 없다. 이해의 폭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웬만해선 큰 불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해의 폭이 급격히 좁아지고 있다. 이기심이 돌림병처럼 번지면서 오로지 ‘나’밖에 없다. 이웃이나 동료·가족 등 ‘우리’마저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극강의 이기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눈곱만큼이라도 손해를 본다 싶으면 거의 죽자고 달려드는 분위기다. 분노를 유발하거나 조절을 힘들게 하는 삶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단어가 ‘내로남불’ 아닌가. 폐를 끼치고 예의가 없는 것들이 볼썽사납게 매너와 상식을 말하면서 세상을 더욱 꼬이게 만든다. 누워서 크는 콩나물이 자세를 이야기하고, 연탄 한 장 안 날랐던 뺀질이가 봉사활동 기념사진 찍을 때 얼굴에 검정을 묻히고 나타난다. 책임은 다하기 싫고 과실은 따먹겠다는 심보가 암세포 같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대한민국에서 여·야가 바뀌면 정권 초기에는 예외 없이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이 등장한다. 권력만 잡으면 하고 싶었던 일들에 올인한다. 그게 정책이든 사법처리든 ‘미래’와 ‘정의’라는 이름표를 붙여 강한 드라이브를 건다. ‘바로잡는 과정’이라고 강조하지만 누구는 보복이라며 치를 떤다. 몇몇 정책을 두고서도 한쪽에서는 후세를 위한 선택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대중영합주의라고 쏘아붙인다.

지금도 파헤쳐지고 있는 전 정권의 국정농단은 ‘정도껏’의 범위를 한참 넘었다.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고 외친 정당에 정권을 맡겼고 파격적인 소통으로 국민 눈높이에 감성적으로는 안착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제 과거 말고 미래를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나라발전과 국민행복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그 고민과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란 단어가 나온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아무리 좋은 뜻이 담긴 정책과 통치라도 양면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구 쏟아내는 순간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역시 ‘비정상의 정상화’가 될 수 있다. B와 C가 으르렁거릴 때 웃픈 A의 처지에서 ‘우리’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왜일까.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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