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시인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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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6 07:53  |  수정 2017-11-06 07:53  |  발행일 2017-11-06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시인의 마음

감나무는 시골과 도시 주택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감나무는 궁금증이 많아 가지를 담장 너머로 뻗길 좋아한다. 골목길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가지들은 정신없이 걸어가는 도시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준다. 5월의 감꽃은 고향 뒷산 뻐꾸기 울음소리와 유년의 나른한 봄날을 떠오르게 한다. 입동 무렵 앙상한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빨간 감들은 깊어가는 가을과 다가오는 겨울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지금도 홍시나 삭힌 감을 먹으면 고향 친구들이 생각나고, 감 따다가 떨어져 다친 허리 때문에 세상을 떠난 동네 어른이 생각난다.

재작년에 둘째 형님께서 감나무 묘목을 한 그루 가져와서 막냇동생 집 마당에 직접 심어주셨다. 겨울이 다가오자 어린 나무가 얼지 않도록 볏짚으로 잔가지까지 야무지게 감싸 주셨다. 지난해에는 감꽃이 피었고, 두 개는 비바람을 잘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 보기 좋게 익었다. 처음 달린 감을 까치밥으로 주기로 결정하고 그냥 두었다. 섣달이 지나고 정월이 되자 까치와 다른 새들이 찾아와서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올해는 해거리를 하는지 꽃은 피었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감이 하나도 없었다. 형님께서는 감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금년에는 나무가 자라고 내년에는 제법 열리겠다고 하셨다. 다음 해를 기약하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가을이 깊어가면서 잘 익은 이웃집 감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쉽고 허전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일찍 형님이 오셨다. 실내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지고 온 배낭을 열면서 “감 달아주러 왔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동생에게 감 세 개를 꺼내 보여주며 씩 웃으셨다. 감꼭지가 아직 가지에 붙어 있었다. 형님은 가지고 온 갈색 실로 감 가지를 우리 집 감나무에 챙챙 감아 매달았다. 두 발자국 정도만 떨어져도 실은 보이지 않아 진짜로 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홍시가 될 때까지 실컷 보고 삼동에 새들이 먹도록 그냥 내버려 둬라”고 하셨다. 감이 열리지 않아 아쉬워하는 동생을 위해 감을 달아 줄 생각을 한 형님의 발상이 너무 놀라웠다. 나는 사진을 찍어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보냈다. 형님은 올해 팔순이시다.

엄원태 시인은 카톡에 올린 사진과 사연을 보고 “아, 정말 멋쟁이!”라는 답을 보냈다. 저녁에 송재학, 장옥관 시인을 만나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니, 두 시인은 이구동성으로 “형님이 진짜 시인이시네”라며 감탄했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시를 쓰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유년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동심과 시심을 평생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형님, 감 달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운동 열심히 하시고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너도 적은 나이 아니니 무리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라.”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벌써 내일이면 입동이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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