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그리 바삐 읽어서 뭐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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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6 07:44  |  수정 2017-11-06 07:44  |  발행일 2017-11-06 제15면
[행복한 교육] 그리 바삐 읽어서 뭐하게요

라다크라는 곳이 있다. 인도 북쪽 히말라야 근처 해발 3천500m에 있는 옛 도시다. 환경이 척박하여 오랫동안 서구 문명과 접촉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문화와 자급자족 경제로 살아가는, 한 마디로 오지인 곳이다. 라다크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서는 공존과 여유의 공동체 사회가 서구 문화를 접하면서 이기와 경쟁의 탐욕 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비록 작은 마을의 기록이지만 세계화의 허상과 획일성을 꿰뚫어보고 있어 현대 문명 비판서이자 대안을 제시하는 책으로 오래 호평을 받아왔다.

그 책을 나는 요즘 수업시간에 가르치고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 책의 서문에 나오는 네 페이지 정도 분량의 글을 읽고 있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교과서에 실린 부분이 구체적인 사례가 적고 문명을 비판하는 추상적인 내용이다 보니 학생들은 글이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그래서 라다크 관련 동영상을 찾아 보여주고, 저자의 인터뷰도 잘라서 보여준다. 아이들은 책 대신 화면으로 히말라야의 눈과 라다크 사람들의 의식주, 따스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들,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 본들 직접 아이들이 이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에 비하면 참 씁쓸한 일이다.

이 책 한 권을 함께 오롯이 읽는 수업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시간 동안 읽고 그 사이에 예쁜 책갈피를 끼워 놓고, 맘에 드는 구절을 넣은 엽서를 만들고, 혹은 책의 인물에게 보내는 두세 줄의 안부를 넣어 그림을 그리고, 함께 작가의 의중에 대해 토론도 하고, 다른 사람이 쓴 서평을 읽고 트집도 잡아보고, 나만의 새로운 서평을 쓰고 발표도 하는 그런 책 읽기 수업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시험에 나온다는 협박으로 암기하고 밑줄 긋게 하는 읽기가 아니라 ‘네가 맘에 드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봐’와 같은 향기 나는 말을 하고 ‘네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그 이유는’라든지 ‘우리가 꼭 지켜가야 할 사회적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켜보고 싶다.

한 시간만 읽고 숙제로 독후감 내는 읽기가 아니라 열 시간쯤 같이 책을 읽는 수업, 때로는 입을 맞추어 큰 소리로 같이 읽고 한 문장씩 서로 주고받듯 노래처럼 읽기도 하고, 한 줄은 눈으로 읽고 한 줄은 입으로 읽는 게임도 해 보고 싶다. 그 모든 활동을 국어 수업의 이름으로, 읽기 지도의 이름으로 해 보고 싶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자유롭게 쓰고, 친구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고 끄덕여주고, 멍 때리듯이 낯선 지역을 상상해 보고, 여행자로서의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볼 것이다. 누군가 “그래서 몇 권이나 읽을 수 있나요”하고 보채면 “그리 바삐 읽어서 뭐하게요”하고 낭창하게 답하며 말이다.

이미 이런 읽기 수업이 시작되고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벌써부터 시도하는 선생님과 학교가 늘고 있다. 읽기 수업의 새로운 영토가 만들어지고 있다. 덕분에 맘 놓고 수업 시간에 책을 읽는 아이들, 독서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너머 운동장 나무들이 노랗게 단풍 들고 있다. 가을도 책장을 넘기고 있나 보다. 이금희 (대구 동문고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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