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6] 토막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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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2   |  발행일 2017-11-02 제29면   |  수정 2017-11-02
칠성동 등 시장부근 토막촌 1천가구 비참한 생활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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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이재민들은 이불이 없어 가마니를 덮은 채 밤을 새우고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등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영남일보 1946년 11월3일자)

의식주 해결이 변변치 않았던 광복 직후는 여름인 8월부터 행정당국 주도로 월동 준비를 했다. 겨울을 나려면 목탄이나 무연탄, 장작 등이 필수 준비품목이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예컨대 1946년 대구부의 무연탄은 6만t가량 필요했지만 정작 준비된 물량은 6천t에 불과했다. 장작과 목탄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민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나 집도 절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와 삶터가 없는 토막이재민(전재민)들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했다.


움막 토막민 가마니·거적 덮고 밤 지새워
식량배급표 없어 상당수 쌀 한톨 못 받아
콜레라 겁낼 겨를 없을정도로 고단한 삶
부호·요정주인, 귀국 동포에 빈방 주기도



‘의식족이지예절(衣食足而知禮節)’이라는 말은 봉건시대에 많이 전해졌던 말이지만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라도 해당할 수 있는 금언이다. 만리이역에서 조국 광복의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랫동안 일제에게 핍박을 받아오던 쓰라림도 그날로서 종막을 고하고 그때부터는 그리운 고국에 돌아만 가면 당당한 독립국가의 한 민족으로 훌륭한 일꾼이 되는 동시에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도 못하였을 것이다.~’(영남일보 1946년 11월3일자)

대구에는 지금의 칠성동 일대와 원대동, 남문, 서문 등 각 시장 부근에 1천세대 이상의 토막이재민이 살았다. 이는 8개 수용소에 집단 거주하는 500여 세대의 전재민을 뺀 수다. 움집에 사는 토막민들은 찬바람에도 이불 대신 가마니와 거적을 덮고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더구나 일반 부민들이 하루 잡곡 2합을 받아 끼니를 때우는데 비해 이들은 식량배급표가 없어 한 톨의 쌀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국하자마자 농촌으로 들어갔다 살길이 없어 다시 도시로 나오면서 전출증명을 못 받은 것이다. 전출증명이 있어야 식량배급표를 받을 수 있었다.

‘~한 노파가 모두 호열자에 걸려 죽는다 해도 우리는 죽지도 않아요. 여름에 어린것들이 별별 것을 다 주어먹어도 죽기는커녕…하고 말을 끊어버리며 웃음을 띠운다. 그 웃음은 얼음장 같은 세태를 웃는 것이 아니면 비운에 빠져 있는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는 한숨 대신의 웃음일 것이다. 이곳에 있는 움막은 비극의 무대며~’(영남일보 1946년 11월2일자) 당시 공포의 병이었던 호열자(콜레라)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토막촌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생활이 모두 똑같지는 않았다. 사과나 떡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을 했다. 낫다 해봐야 몇 십 원의 수익으로 강냉이죽일망정 하루 두 끼는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는 날품과 지게꾼이었다. 비가 오거나 몸이 아픈 날은 굶는 것이 예사였다.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와 함께 해마저 짧아 더 고달팠다.

1947년 새해가 되자 적산요정과 여관, 유곽 등을 전재동포에게 개방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가옥 가운데는 빈집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부호들과 적산요정 주인들 중 일부는 100여 세대의 이재동포들을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살도록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온기만으로 토막이재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는 없었다. ‘살만해야 예절이나 체면을 차리며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의식족이지예절)는 기사의 인용구 그대로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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