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7> ‘참으로 보배스러운 이들을 기리며’…청송 진보면의 귀암정·송만정·백호서당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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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1   |  발행일 2017-11-01 제13면   |  수정 2021-06-21 17:24
낡았지만 웅장한 귀암정, 氣는 거대한 바윗돌처럼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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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는 귀암 권덕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귀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한 권덕조는 을사사화(1545년) 이후 관직을 버리고 청송에 정착했다.

 

 

진보면(眞寶面)은 청송의 가장 북쪽 땅이다. 동남부에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을 뿐 청송군 내에서 비교적 구릉지가 많은 곳이다. 또한 반변천과 서시천이 흘러 충적지도 넓은 편이다. 진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이곳 대동산(大同山)에 봉수를 설치하고 ‘위급함을 알려주는 참으로 보배스러운 곳’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진보의 풍부한 물과 들, 기억되고 숭모되는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보배스러운 것이다.

#1. 귀암 권덕조의 귀암정

진보면 소재지 북쪽에 광덕리(廣德里)가 있다. 마을 뒤쪽에는 ‘광대하고 웅장하다’는 광덕산(廣德山)이 솟아 있는데 일명 두음산(斗蔭山), 북방산(北方山)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앞에는 반변천이 흐른다. 일월산에서 발현해 남쪽으로 흐르던 반변천은 마을 앞에서 서시천을 안으면서 서쪽으로 향한다. 마을은 물 위의 마을이라 하여 ‘한상(漢上)’이라고 했다가 터가 한양을 닮았다 하여 ‘새로운 한양’이란 뜻의 ‘신한(新漢)’이라고도 했다. 배산임수의 좋은 땅이다.

천을 건너는 광덕교에서 당당하게 선 광덕산과 마주한다. 저 산 아래에 진보향교가 위치하고 그 서쪽에 ‘귀암정(歸巖亭)’이 자리한다. 귀암(歸巖) 권덕조(權德操)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그는 고려 태사공 권행의 21세손으로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건장하고 신실하고 바르고 소견이 넓고 생각은 깊었으며 늘 너그러웠다 한다. 숙부인 충제(濟) 권벌(權)에게 학문을 배우며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했으며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귀암은 을사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했다. 사람들이 왜 벼슬하지 않느냐고 궁금해 하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중종의 기일에 스스로 제수를 마련해놓고 통곡했다 한다. 후에 사림에서 그를 기려 옛 집터에 귀암사(歸巖祠)를 세우고 향사(享祀)를 받들어왔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 지금의 정자는 그 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현판은 옛 이름을 그대로다.


귀암 권덕조 기리기 위해 세운 귀암정
태사공 권행 후손으로 퇴계학 정맥 계승
을사사화 이후 관직 버리고 청송에 정착
매년 중종 기일 제수 차려 통곡했다 전해

귀암정 남동쪽 반변천 가 자리한 송만정
귀암 권덕조 아들 송만 권준의 정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 일으켜 전장에 나가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전승’ 이끌어

음식디미방 쓴 장계향의 아들 이휘일
영남학파 학자로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
사후에 그를 따르던 많은 유림이 건의해
진보 향중에서 영조 때 백호서당 건립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왼쪽 앞에 ‘ㅁ’자형 주사채가 한 동 있는데 입김에도 바스라질 듯하다.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인적이 없다. 사람이 떠난 집은 초속으로 늙는다. 정자 역시 인적이 끊긴 지 오래고 매우 낡았다. 퇴색되어 아련하고 움직임 없는 채로 기묘하게 굳어버린 모습이다. 그런데도 대단히 웅장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정자는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뒤에는 광덕산 자락이 온화하고 단정하게 뻗어 내려오고 앞에는 들이 넓다. 귀암정은 남쪽의 거대한 비봉산(飛鳳山)과 대면한다. 조금의 위축도 없이 형형한 기(氣)로 마주한다. 낡았으나 웅장한 귀암정은 거대한 바윗돌처럼 기가 강성하다.

귀암정 상량문에 ‘두산이 북쪽에 솟으니 바람이 모이고 한수가 서쪽으로 흐르니 옷깃 싸임이 공고하다. 장인(匠人)을 감독하니 빛나는 정자가 웅장하고 홀연히 산천의 경치가 보인다. 겨울과 여름에 공부함은 동리 서실의 규모에 의하였다. 일편의 붉은 충절이 고금과 같다. 원컨대 후손들에게 효충의 명의를 가르쳐 아손들이 청숙한 기운으로 태어나 밝은 세대에 많은 인재가 나와 무궁하리라’ 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여든이 넘은 고령이었고 그의 마음속 충정은 그의 아들이 행동으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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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송만 권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권준 스스로 송만정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2. 권덕조의 아들 권준의 송만정 

 

귀암 권덕조의 아들인 송만(松巒) 권준(權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뛰어난 전략을 세워 전승을 이끌었다 한다. 전란 후 그는 은거하여 소나무를 쓰다듬고 호를 ‘송만’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항상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의 정자가 귀암정의 남동쪽 반변천 가에 있다. 송만정(松巒亭)이다.

송만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ㄷ’자형 평면이다. 가운데 2칸 대청을 열고 양쪽 방 앞에만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설치했다. 누마루의 바깥쪽 측면은 판벽과 살창으로 막았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이 매우 높고 큼직한 돌로 계단을 만들어 성큼성큼 오르게 된다.

초석 역시 큼직한 바윗돌을 썼고 그 위에 팔각의 누 하주가 올라 있다. 마루 위로 굵은 기둥과 보가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누마루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정면에는 낮게 주사가 자리한다. 주사도 ‘ㄷ’자형 평면으로 정자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체 ‘ㅁ’자형을 그린다. 이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구성이다. 정면은 나지막하게 둔덕진 땅이다. 그 너머로 반변천이 흐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시야는 주사의 지붕을 넘어 하늘을 향해 광대하게 열려 있다.

원래 처음에 권준이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가 않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63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판도 후대에 게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 모습인데 옛 목재와 새 목재가 어우러져 따뜻한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권준의 아들 지선(止善) 역시 지극한 효자였다고 하는데, 효종이 사찬(賜饌)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는 사적이 읍지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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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서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존재 이휘일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영남학파의 학자인 이휘일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3. 음식디미방 쓴 장계향 아들 이휘일의 뜻이 담긴 백호서당 

 

광덕리의 서편에 좁고 긴 골짜기 마을 세장리(世長里)가 있다. 옛날에는 누운 용의 형상이라 ‘누용실’ 혹은 누운 누에의 형상이라 ‘누에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약 3㎞의 시냇물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반변천과 합류하는데 마을은 그 시내의 중상류에 형성되어 있다. 한참을 올라 세장리 마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백호서당(栢湖書堂) 이정표인데 개천을 건너 산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한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갑자기 길이 끝나면서 꽤나 너른 터가 펼쳐진다. 푸른 반변천이 바로 아래인 벼랑 위다. 백호서당은 주사로 보이는 집 한 채를 앞에 세워두고 그 뒤에 높직이 서 있다. 먼 비봉산의 밑동까지 보이는 대단한 시야를 가진 자리다.

백호서당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한 서당이다. 이휘일은 영남학파의 학자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농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이다. 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동생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어머니는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 장계향(張桂香)으로 여중군자로 칭송받았던 ‘음식디미방’의 저자다. 서당은 그의 사후 그를 따르던 많은 지방 유림이 건의하고 당시의 청송현감 조명협(曺命協)이 발의해 진보 향중(鄕中)에서 영조 때인 1757년 건립했다.

지금 이곳은 원래 서당이 있던 자리가 아니다. 1989년 안동 임하댐의 건설로 원래의 자리가 수몰지에 편입되자 이곳으로 옮겼다. 70m 정도 이동한 것이라니 주변 경관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백호는 잣나무와 호수를 뜻한다. 처음 건립될 때 주변에 잣나무들이 무성했고 반변천의 물줄기가 호수처럼 보였다고 한다.

백호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2칸을 대청으로 열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현판은 이휘일의 동생인 갈암의 친필이라고 한다. 측면의 작은 방문으로만 건물 내부로 오를 수 있는데 이는 근래의 조치인 듯하다. 대청의 뒷문 속으로 비봉산하의 마을과 들이 펼쳐진다.

이휘일에게 자연은 이상적인 공간 혹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민의 땀과 삶이 담긴 노동의 공간으로 보았다. 그의 작품 ‘전가팔곡’은 순수한 우리말로 사계절 노동의 기쁨을 노래한다. ‘가을에 곡식 보니 좋기도 좋구나/ 내 힘으로 이룬 것이 먹어도 맛있구나/ 이 밖에 천사만종(千駟萬種)을 부러워 무엇하리오.’ 먼 들이 선명한 노란색이다. 백호서당은 뿌듯하고 부러울 것 없이 서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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