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수건춤과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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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3   |  발행일 2017-10-23 제30면   |  수정 2017-10-23
끈질긴 생명력의 은유인
백년욱 선생의 수건춤은
대구의 중요한 문화유산
궁중舞의 우아함과
민속춤의 시원함을 배합
[아침을 열며] 수건춤과 동양철학
박소경 호산대 총장

지난달 19일 수성아트피아에서는 보기 드문 큰 공연이 열렸다.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엄옥자의 북춤,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의 연주, 한량무 예능보유자 조흥동의 무릉도원, 대구시 무형문화재 백년욱의 정소산류수건춤이 격조 있는 연출과 함께 무대 공간을 메웠다. 엄옥자의 북춤은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이생강 선생에게서는 공자의 ‘예술에 노니는 군자’와 꼿꼿한 조선 선비가 겹쳐 보였다. 조흥동 선생은 선비 같은 한량춤의 거인이다. 버선발의 발놀림에서 한량의 활달함이, 섬세하고 고운 상체의 움직임에서는 선비의 고고함이 관객을 압도했다.

백년욱 선생은 노을빛 치마에 역시 빛바랜 색동저고리를 받쳐 입는다. 시집올 때 입었을 붉은 예복치마와 알록달록 색동저고리는 세월 따라 그 빛을 잃었지만, 한국 여인으로 살아온 그에게서는 ‘디바(여신)’의 빛이 드러난다. 누군가가 말했다. “남자가 위대하다면 여자는 거룩하다”고. 원래 우리의 한복은 현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평범하기 그지없이 넉넉하고 천진하고 순박하기만 하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입으면 어른스럽지만 나이 든 사람은 되레 어려 보인다.

한복의 둥근 선을 보면 태극의 곡선이 연상된다. 주돈이(1017~73)가 지은 ‘태극도설’에서 태극은 음양과 오행을 낳는 만물의 근원이다. 나중에 주희(1130~1200)는 그 유래를 불교와 노자에서 찾는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신유학자들은 ‘형이상의 도(道)’인 태극의 심원함을 귀히 여겼다. 그들은 움직임의 양(陽)과 멈춤의 음(陰)의 그림을 살짝 고쳤다. 양 중에 음이 있고, 음 중에 양이 있는 S자 곡선으로 만든 것이다. 생성·소멸의 순환 반복과 소용돌이 문양을 우주의 원리로 본 한국의 마음은 불교를 숭상한 먼 선조로부터 찾을 수도 있겠다. 상박하후(上薄下厚)로 표현되는 여성 한복은 저고리의 도련선, 고무신의 앞코, 버선코에 태극의 곡선이 살아 있다.

백년욱 선생은 스승에게 ‘거미’처럼 끈끈하게 춤추라 배웠다. 끈끈함은 질긴 생명력의 은유이며, 거미는 서양에서 모성을 의미한다. 거미는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며, 자신의 몸을 자식에게 내어준다. 선생의 춤은 나무가 대지에 깊이 뿌리내리듯 다섯 발가락은 바닥을 밀어내며 머리끝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척’ 하는 추임새에서는 고수처럼 “얼씨구 좋다” 소리 내고 싶다. 구성지게 휘어지는 구음 소리 아래서 수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사뿐사뿐 살랑살랑 춤추기도 한다.

새벽이면 창을 열고 어린 생명을 업어 키우며 일하다가 멈칫 뒷짐을 짚는다. 손목춤은 우물물을 고이 뜨듯 조심스럽지만 끝마무리에서는 붓이 획을 거두어들이듯이 그었다가 슬쩍 위로 멈춘다. 뿌리는 굳되 보기는 부드러운 서예와 통하는 부분이다. 손가락과 발끝, 작은 관절의 움직임에 비하면 몸의 축은 멈춘 듯 고요하다. 이는 말(末)보다 본(本)을, 용(用)보다 체(體)를 중시하는 동양철학과 맞닿아 있다.

조흥동 선생의 춤은 한 폭의 수묵화 같기도 하고, 탁 트여 대아(大我)적 면모가 드러난다. 한량은 강한 야성을 지녔지만 승화되고 절제되어 맹자의 대장부가 된다. 옛 선비는 거문고를 탔다는데, 지금 이 대금 소리는 가장 깊은 몸 안에서 나는 소리 같다. 서양 음악은 지나치게 질서 정연하여 단조롭지만, 대금은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연주자 몫인 즉흥 연주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 소리가 깊게 다가온다면 여유가 있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개의 페르소나를 가진다. 토요일 오후면 나는 백년욱 선생을 보며, 그리고 거울을 보며, 그 오묘한 미소와 한숨과 웃음을 따라 지으려 노력한다. 중국에 고서가 있고 일본에 하이쿠가 있다면 우리에겐 궁중무와 민속춤이 있다. 궁중무의 우아함과 민속춤의 시원함을 배합한 대구의 수건춤은 우리가 가진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많은 시민이 전수관에 와서 수건춤의 ‘멋’을 배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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