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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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0   |  발행일 2017-10-20 제41면   |  수정 2017-10-20
식은밥·묵은지·멸치육수가 만나니 추억이 ‘보글보글’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망각되고 있던 대구식 갱시기문화에 다시 불을 지핀 수성구 범어동 ‘곰비곰비’의 갱시기.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어패류가 들어간 갱시기 같은 포항 구룡포의 명물 ‘모리국수’.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김천 부항면의 갱시기는 감자, 고구마 등이 첨가돼 대구식보다 더 걸쭉한 게 특징이다. <영남일보 DB>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묵채가 들어간 갱시기 같은 경북 북부권역 명물음식 ‘묵전골(태평초)’.

비빔밥과 국밥의 경계에 놓인 달구벌음식의 원형 같은 게 있다. 지금은 거의 망각된 ‘갱시기’다. 10년전 대구십미 선정위원회가 대구대표 10가지 음식을 골라낼 때 중요한 갱시기는 빠트리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대구가 종주권을 갖고 있는 갱시기가 ‘대구별식의 원형’으로 재조명됐으면 좋겠다.

일단 ‘갱(羹)’의 어원을 분석해보자. 3세기경 중국의 시모음집인 ‘초사(楚辭)’ 속에 이 단어가 나타난다. 갱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 이와 비슷한 ‘확’이란 탕국이 있는데 곰탕처럼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이다. 갱시기는 쌀알을 넣어 끓이는 죽과 달리 한번 밥이 된 걸 다시 넣어 끓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갱시기를 ‘갱식(更食)’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갱시기는 확보다 갱에 가깝다. 이름하여 ‘갱식(羹食)’, 이게 연음되면 갱시기.

궁핍한 시절 온식구 허기 달래주던 음식
형편 나아진 70년대엔 주식서 별식으로

경상도 대표식으로 재료 따라 변주 다양
묵전골·모리국수 등 닮은꼴 음식 주목
25년 前엔 대구 ‘라면갱시기’까지 개발
김천 부항면선 감자·고구마 넣어 속 푸짐
최근 수성구 ‘곰비곰비’ 갱시기 붐 주도

◆갱시기는 추억의 대구별식

갱시기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식구들의 끼니를 쉽게 해결해 줬던 고마운 별식이었다. 양식을 조금이나마 절약하기 위해 식은 밥을 활용할 때 갱시기만 한 게 없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국밥은 잔치 때나 만날 수 있었다. 평소 채소를 중심으로 한 국밥 중 아녀자들에겐 갱시기가 가장 만만했다. 갱시기를 먹을 때는 따로 반찬을 준비하지 않는다. 형편이 나아진 70년대 이후 농번기 새참으로 갱시기를 먹기 시작했다. 쌀 소출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주식이 아닌 별식으로 자릴 잡는다.

갱시기 맛의 원천은 ‘묵은지’다. 겉절이 김치로는 맛이 안 난다. 김장 김치가 1~2년 푹 삭아 시큼한 맛이 절정을 이룰 때 갱시기 맛도 최상급이 된다. 별다른 냉장시설이 없던 그때는 곰팡이 핀 군둥내 나는 묵은지도 솥에 들어가기 전 전처리를 받아야만 했다. 한번 씻어 고춧가루 등을 제거한 뒤 쫑쫑 썰어 사용했다. 갱시기 용 고춧가루는 묵은지에 묻은 것보다 별도 고춧가루를 넣어야 제맛이 난다. 이 밖에 썬 가래떡, 거기에 콩나물, 멸치 육수 등이 섞여야 진미가 된다.

사골로 육수를 내면 맛이 절대 나질 않았다. 꼭 멸치 육수를 사용해야 된다. 물론 하절기보다 동절기가 적기다. 아침과 저녁은 아니고 점심때 먹어야 제대로 된 울림이 난다. 갱시기 전문식당에선 식감 때문에 찬밥을 사용하지 않는다. 죽 끓일 때처럼 불린 쌀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느 가정에선 식은 밥이 선호된다. 물론 김가루, 라면, 소면, 칼국수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밥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죽맛으로 변질된다. 국물이 부족하면 비빔밥이 돼버린다. 콩나물 비중이 늘어나면 꼭 전주 콩나물국밥 같은 느낌이다. 육수량과 묵은지, 여타 채소류의 안배, 이것이 갱시기 맛의 승부처.

김영삼 대통령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8년 10월까지 청와대 주방을 책임졌던 이근배씨. 그가 여성조선을 통해 ‘대통령들의 식단’을 공개했다. 노태우 대통령도 입맛이 없는 점심때 무척 즐긴 음식이 바로 갱시기였다고 한다.

◆대구는 갱시기 고장

갱시기는 별칭이 많다. 밥시기, 국시기, 갱죽, 콩나물김치죽, 갱싱이죽, 밥구족, 김치죽, 밥쑤게…. 대구를 축으로 한 경상도 대표식이기도 하지만 실은 레시피와 식재료만 조금씩 다를 뿐 대동소이한 지역별 갱시기가 많다. 어촌의 어죽과 어탕국수도 비슷한 포스를 갖고 있다. 김천에서는 ‘개양죽’ 또는 ‘개양시기’라 했다. 칠곡군에서는 ‘갱죽’으로 불린다. 경주의 대표적 해장국인 팔우정 해장국은 일견 ‘묵갱시기’처럼 보인다. 25년전 전국 최초의 라면 전문점이란 기치를 내건 중구 남일동 중앙시네마 맞은편 골목에 자리잡은 ‘청춘라면’은 라면에 콩나물이 들어간 ‘라면 갱시기’ 시대를 열었다.

5년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한 집에서 포항식 갱시기를 맛봤다. 정말 단출했다. 묵은지, 콩나물, 쌀, 멸치 육수 등은 같았지만 가래떡 대신 감자를 넣었다. 가마솥에서 끓이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상옥리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멸치 육수와 묵은지가 제일 중요한 식재료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는 갱시기를 모른다. 최소 7080세대가 되어야 이 음식의 울림을 제대로 이해한다. 갱시기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접경에서 피어난 ‘경계의 음식’. 언뜻 50년대 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물로 만든 ‘꿀꿀이죽’의 변형 같기도 하다.

대구는 한국 육개장의 발상지. 1929년 종합잡지 ‘별건곤’이 이를 알려준다. 대구의 육개장 문화가 갱시기 문화와 무관할 리 없다. 또한 따로국밥, 묵전골(일명 태평초) 등도 갱시기 인프라를 풍성하게 해줬다.

갱시기는 밥도 아니고 국도 아니다. 남은 반찬이 뒤섞여 새로운 하모니를 파생시키는 ‘합창의 음식’. 배달음식도 부재하고 근처에 식당도 거의 없던 시절, 아낙네들은 남편 출근시켜놓고 품 넓은 이웃집으로 몰려갔다. 남은 반찬을 하나씩 들고서. 늦은 오후까지 수다를 떨면서 갱시기를 끓여먹었다. 일종의 한국식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의 주메뉴였다. 라면과 소시지류가 첨가되면 대구식 부대찌개, 주당 남편의 쓰린 아침 속을 달래주는 ‘패스트 해장국’이었다.

◆갱시기 부활 알린 ‘곰비곰비’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대구 시내 곳곳에 포진했던 갱시기 전문식당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수성교 방향으로 있는 우리은행과 대구은행 중간도로 300m 지점에 있는 ‘곰비곰비’가 잊혀가던 갱시기를 되살려 낸다. 여긴 밥과 국수로 갱시기를 만든다. 육수는 멸치, 디포리, 다시마, 무, 대파, 생강, 고추씨, 명태대가리, 양파 등으로 추출한다. 맛의 포인트는 물론 묵은지. 육젓은 쓰지 않고 6개월 이상 숙성된 멸치와 새우액젓만 갖고 김치를 만든다.

갱시기와 무척 닮은 음식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건 포항 구룡포의 명물 해물칼국수인 ‘모리국수’. 이 음식의 탄생지는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957-3 ‘까꾸네’이다. ‘모리’란 ‘한꺼번에’ ‘잡탕’ 등의 의미다. 아귀, 홍합 등 온갖 해산물에 콩나물과 칼국수를 넣고 끓인다. 꼭 구룡포식 갱시기 같다. 이 맛이 얼마전 대구에 상륙했다. 시내 종로의 중식당 천안성 옆 ‘상상속에 국수에서’도 자기만의 모리국수를 판다. 매일 홍합, 미더덕, 파, 건새우 등으로 한꺼번에 50인분 기본 육수를 마련한다. 까꾸네의 맛을 좀 편곡했다. 대구 갱시기는 멸치로 육수를 만드는데 여긴 어패류로 만든다. 육수도 초탕·재탕을 통해 완성된다. 그 과정에 아귀 내장이 큰 구실을 한다. 아귀 대신 대구·명태를 사용하면 비린내가 풍겨 맛을 망친다.콩나물도 맛의 중요한 원천이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이 들어가도 맛이 확 달라진다. 콩나물도 국수를 넣고 3분의 1 정도 끓을 때 집어넣는다. 까꾸네는 건면이지만 여긴 생면을 사용한다. 이 집은 묵은지와 달리 마늘과 고춧가루로 끝맛을 잡아준다.

◆김천 갱시기 이야기

갱시기는 직지사 산채한정식, 지례흑돼지와 함께 김천의 대표 향토음식. 특히 부항면은 ‘김천갱시기의 본가’로 알려져 있다. 개발의 바람이 늦게 찾아와 최근까지도 갱시기를 즐긴다. 부항면의 갱시기는 뻑뻑한 느낌이 날 정도로 속이 푸짐하다. 얼핏 김칫국과 비슷하지만 콩나물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를 굵직하게 썰어 넣은 게 특징이다.

현재 김천부항댐 위치인 옛 부항천 주변은 산촌임에도 불구하고 꽤 너른 논이 있었지만 평야지대에 비해 넉넉한 삶을 꾸려가기가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만든 음식이 갱시기였다. 육수를 내는 동안 콩나물과 묵은지를 준비한다. 갱시기의 국물은 멸치로 우려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맹물에다 끓여먹었다. 육수가 마련되면 멸치를 건져낸 후 콩나물과 묵은지를 넣는다. 여기에선 감자나 고구마를 넣고 쌀이나 찬밥까지 함께 넣고 끓인다.

부항면 갱시기의 백미는 감자나 고구마를 건져먹는 것. ‘감자갱시기’는 어르신들이 좋아했고, 달콤한 ‘고구마갱시기’는 여성들이 즐겼다. 형편이 좋은 집은 국수나 가래떡을 넣어 먹었다. 여기 갱시기에는 절대 참기름 같은 게 안 들어간다. 그래야 맛이 깔끔하다. 부항면 일부는 2013년 준공한 부항댐의 수면 아래로 사라졌지만 갱시기 추억은 더 짙어만 간다.

대항면 황악로 김천직지사 입구에 있는 ‘기찻길옆오막살이’도 20년 이상 구력의 갱시기 전문점이다. 한약재를 멸치 육수에 섞는 게 특징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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