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봉화 문수산 우곡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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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0   |  발행일 2017-10-20 제36면   |  수정 2017-10-20
잠시의 산책으로도 고결한 평화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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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입구. 십자가와 ‘칠극’ 책을 가슴에 안은 홍유한 선생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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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성당. 1995년 성지 조성 때 세워진 것으로 홍유한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칠극성당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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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의 길. 복오, 평투, 해탐, 식분, 색도, 방음, 책태 등 칠극의 가르침을 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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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성당 옆 바위벼랑 아래에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있다.

봉화의 진산, 문수산. 신라시대 지혜로운 문수보살이 이 산에 화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웅크린 독수리 형상이라는 문수산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축서사와, 봄이면 산수유 꽃으로 뒤덮이는 띠띠미마을과, 귀한 아름드리 춘양목의 숲과, 오래 이름 높은 약수를 품고 있다. 그 산의 남쪽 사면에 우곡리가 있다. 문수골이라 부르는 긴 골짜기의 깊은 곳에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우곡성지다.

문수산 남쪽 깊은 골짜기 가톨릭 성지
조선 실학자로 한국 천주교 창립 전부터
28년 간 ‘七極’ 따르며 수계생활 실천
韓 천주교 첫 修德者 홍유한의 묘 일대

여름이면 가재축제도 열리는 聖地 계곡
칠극 적힌 바위가 인도하는 ‘칠극의 길’
길의 끝 칠극성당엔 한복 입은 성모상

◆ 우곡리, 문수산 문수골

몇 대의 관광버스가 작은 마을에 웅성웅성하다. 곳곳에 보이는 ‘다덕약수’ 이름의 힘이다. 우곡리는 몰라도 대개 알 만한 이름 ‘다덕(多德)’. 많은 사람이 덕을 보았다는 다덕은 우곡2리 마을이름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우곡 약수라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곳에 다덕광업소가 있었고 그 이름을 따 다덕약수라 했다는데, 다덕마을을 지나며 다덕의 시작은 마을일까 광업소일까 하는 감감한 생각을 한다.

북쪽으로 깊어지는 골짜기다. 흔히 문수산 문수골이라 부른다. 사과밭이 많이 보인다. 길은 시거리길, 천은 시거리천이다. 상류에 있는 자연부락 이름이 시거리인데 삼거리라는 뜻이다. 천은 길에 바짝 붙기도 하고 보이지 않게 멀어지기도 한다. 우곡1리에 접어들자 시거리천의 맑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우르실, 밤이면 산짐승들이 우글거린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지금은 가재마을이다. 1급수에만 산다는 가재가 시거리천에 우글우글하단다. 여름 아오리가 익을 즈음 가재마을에선 가재 축제가 열린다.

가로수마다 작고 붉은 열매가 달렸다. 틀림없이 꽃 사과일 거라 생각했는데 검은 점박이 열매다. “아저씨, 저 빨간 열매 달린 거 무슨 나무예요?” “가로수? 서양 딸기나무라 하대.” 아, 분명 산딸나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십자가가 되었던 나무. 또한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닮아서 성스럽게 여기는 나무다. 그러자 저 앞에 십자가가 보인다. 그 옆에는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선비가 서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홍유한(洪儒漢)이다.

◆우곡성지

홍유한은 한국교회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알려져 있다. 수덕자란 평신도 가운데 신앙을 위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간 사람을 말한다. 그는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교적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국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칠극(七極)’에 의한 천주교 수계생활을 28년간 행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1785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신앙생활은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나 한국 최초의 신부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보다도 앞선다.

우곡리 문수산 중턱에 그의 묘가 있다. 묘소는 정조 임금이 보낸 지관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일대는 성지로 조성되어 있다. 우곡성지다. 제법 넓은 계류를 중심으로 피정의 집, 청소년 수련원, 칠극성당, 칠극의 길 등이 자리하고 있다. 홍유한의 묘소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고 묘하에는 그의 뜻을 이은 순교자 13명의 가묘(假墓)가 있다. 유해는 찾을 길 없어 순교 터의 흙을 담은 묘들이다.

홍유한은 풍산홍씨로 충남 예산의 명문가 사람이었다. 16세 때인 1742년 부친의 권고로 당대의 대유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이익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천주실의’와 ‘칠극’ 등을 공부하다가 1757년경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8년간, 이후 소백산 아래 단산면 구구리로 들어가 10년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의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명정(銘旌)에는 ‘산림처사 홍공지묘(山林處士 洪公之墓)’라 쓰여 있다고 한다. 홍유한은 자연에 은거해 검소함과 덕행으로 일생을 산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종교든 ‘교리’는 무구하고 깨끗하다. 박해 이전, 정착과 창립 이전의 종교생활이란 ‘교리’와 맞닿아 있을 게다. ‘산림처사’란, 행위의 이름이다.

◆칠극의 길

계곡은 마치 물놀이 장처럼 정비되어 있다. 여름이면 고요와 평화와 맑은 물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오고, 돌멩이 아래에서 고물거리는 가재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수량이 적다. 다리로 건너도 되지만 참방참방 물위를 걸어서 건널 수도 있다.

계곡 가에 ‘칠극의 길’이 있다. ‘칠극’은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가 지은 가톨릭 수덕서(修德書)다. 7가지 이겨내야 할 것들이다. 교만을 누르고, 질투를 가라앉히고, 탐욕을 풀고, 분노를 없애고, 탐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이기고, 음란함을 막고, 게으름을 채찍질하는 것. 교인들은 이를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로 여긴다. 햇빛과 숲 그늘이 넉넉히 갈마드는 물가에 칠극을 새긴 바윗돌이 길을 인도한다. 종교와 무관한 사람에게도 칠극은 심장을 찌르는 송곳같은 것이다. 종교와 무관한 사람에게도 한 그루 소나무 아래 소박하게 마련된 제단은 성스러운 것이다.

길의 끝에 칠극성당이 있다. 비둘기가 날갯짓하는 푸른 스테인드글라스의 창이 있는 작은 성당이다. 성당 뒤로 구불구불 산길이 멀어진다. 성당 옆 바위 벼랑 아래에 한복을 입고 아기를 안은 백색의 성모상이 있다. 종교와 무관한 사람에게도 검소한 성당과 눈부신 성모는 고결하다. 골짜기에 단풍이 들면 몹시 아름다운 고요로 가득 찰 것이다. 길고 엄숙하고 고독한 피정이 아니더라도, 잠시의 산책은 송곳같은 인식과 고결한 평화를 준다. 불가사의한 횡재 혹은 미묘한 수혜와 같은.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영주IC로 나가 봉화 울진 방면 36번 국도를 타고 간다. 봉화읍을 지나 다덕교차로에서 다덕약수 관광지로 좌회전 후 우곡성지 이정표를 따라 우곡1리 방향으로 3㎞ 정도 들어가면 된다. 넓은 주차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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