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어느 멋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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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9   |  발행일 2017-10-19 제34면   |  수정 2017-10-19
지상의 모든 길 위에서
사람들이 거친 숨소리 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마침내 창공이 열리려니…
[여성칼럼] 어느 멋진 날

택배기사를 만났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승강기에 들어섰을 때 그는 커다란 박스 세 개를 포개어 안고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그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소리가 하도 커서 어떤 둥글고 기다란 관에 거센 바람이 들이차고 또 내몰리는 것 같았다. 어깨에 얹어온 내 하루치의 피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뒤쪽 벽 앞에 서서 들숨·날숨에 따라 오르내리는 그의 등을 보고 있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40대 중반쯤으로 짐작되었다.

어느 수필가가 승강기를 ‘골목길’이라고 표현했다. 아래위로 긴 골목, 맞는 말이다. 그는 15층을 눌러놓고 있었고, 나는 12층에서 내렸다. 그의 골목길은 좀 더 남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이른바 ‘가사’라는 일을 하는 동안 그는 다른 골목길들을 몇 차례 더 걸을 터였다.

명절이나 연말이 되면 텔레비전이 컨베이어벨트 위를 줄지어 이동하는 상자들을 보여주곤 한다. 너무 자주 보아서 아무런 감응 없이 그저 멀거니 바라보는 장면이다. 며칠 전에도 마치 자료화면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택배가 물류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방송은 말했다. 택배기사들의 분투기를 전하면서 기사인력 문제를 거론하였고 처우개선이 필요하다고 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은 말을 했다. “딸을 생각하면서 힘든 시간을 견뎌낸다”는 젊은 아빠의 인터뷰도 함께 내보냈다.

관계부처나 전문가들이 내부적으로 개선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는 이들은 그저 다른 부조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고는 그만일 따름이다. 달리 어쩌겠는가.

살아가노라면 특별히 길고 힘든 날이 있다. 그날이 내게도 그런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택시를 탔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신천은 불빛에 흔들리다가 바닥을 내보이다가 하였다. 보의 물은 넘실거리고 보 아래는 바닥의 돌들과 풀숲 사이로 물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휴우~ 이거 영락없는 인력거꾼이지요.” 깜짝 놀랐다.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사람인가 하고 앞을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의 운전기사도 그런 말을 했다. “이건 옛날로 치면 마붑니다.” 자기비하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인력거든 말이든 그 시대의 이동수단이고, 인력거꾼이나 마부는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일 뿐이다. 스스로를 비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때 자신을 마부라며 한숨을 내뱉던 운전기사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마부였어요.” 정말 순식간에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나왔다. 금방 후회했다. 그 기분 나쁜 이름을 입에 담은 것도 그렇거니와 당신도 그 일본인처럼 출세할 수 있다고 말한 것 같아서 많이 부끄러웠다. 하여 인력거꾼이라고 자칭하는 기사에게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날씨 얘기를 했다.

세로로 곧게 뻗은 골목길에서 젊은 택배기사를 만났다고, 그의 호흡이 내게 아팠다고 값싼 연민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운전기사의 자조와 나의 피로가 택배기사의 거친 숨에 얹혀서 함께 소리를 내는 것 같았을 뿐이다.

세상의 곳곳에서, 지상의 모든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노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택배기사의 그 된 호흡소리가 한동안 귀에 남아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숨소리가 아니라 한 생을 살아내는 모든 사람들의 숨소리란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내가, 더불어 우리 모두가 길고 긴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스스로는 물론이고 아무도 미워할 수 없으며, 미워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라디오를 켜니 마침 바리톤 김동규씨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또 보내노라면 마침내 드높은 창공이 열리려니, 그것으로 되었다. 매일매일이 멋진 날인 게다. 허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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