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4] 대구 달성동 장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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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9   |  발행일 2017-10-19 제33면   |  수정 2017-10-19
광복직후 절망적 삶…장님 점쟁이집 문전성시
高물가·식량난·전염병 허덕이던 사람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집 찾아
“저고리에 이름쓰고 삼배” 기이한 처방만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4] 대구 달성동 장봉사
대구 달성동 장봉사의 집은 점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영남일보 1947년 10월18일자)
[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4] 대구 달성동 장봉사

‘~10명이 모두 “아, 장봉사 집이라면 내가 잘 알지요”라고 하는 데에는 기가 막혔다. 달성동 마당을 지나 서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기와로 지은 대문이 서있어 그것이 장봉사의 집이었다. 문에는 ‘일요일은 쉽니다’ 벽보가 붙어 있고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그만 온돌방에 10여 명의 부인이 앉아 있어~’(영남일보 1947년 10월18일자)

당시 대구의 장봉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보기 좋게 기와로 지은 그의 집은 늘 붐볐다. 그를 보려면 꼭두새벽부터 서둘러야 했고 반나절 정도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다. 부녀자들이 비교적 많았지만 남자들도 적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끊이질 않으니 일요일 하루는 쉬는 게 당연했다. 그는 대구에서 유명한 점쟁이였다.

장봉사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까닭은 뭘까. 광복 직후 부민들의 기대와 희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낙담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치솟는 물가와 식량난은 부민들의 생활을 피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게다가 호역(虎疫) 같은 전염병은 눈앞에서 가족을 삼켰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일상의 불안감은 기댈 언덕을 필요로 했다. 점쟁이나 무당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위안의 언덕이었다. 대구에서 장봉사는 단연 인기 점쟁이였다.

장봉사집 기와대문 안의 온돌방은 근심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이 병들었다” “돈이 벌리지 않는다” 등 찾아온 사람들의 고민은 엇비슷했다. 장봉사는 “부적(符籍)을 써야 한다”거나 “아이의 저고리에 이름을 써서 세 번 절하라”는 등 기이한 비방을 내놓았다. 그 비방의 대가는 당시 개봉영화(35원)보다 비싼 50원 안팎이었다.

이런 점쟁이는 일제강점기에도 낯설지 않았다. 특히 달성공원 정문 주변에 점쟁이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일자리를 못 구해 허리가 휘어진 젊은이나 아파도 약 한 첩 구할 형편 없이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점쟁이들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정도였다.

‘~큰 바위 밑에서 수명의 부인이 모여 있는데 그중 2명은 밥을 짓고 나머지 3명은 흙바닥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자, 소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남양 미개인이 하는 원시연한 무용을 하는 자, 노래도 염불도 설교도 아닌 정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소리를 높이 하여~’(영남일보 1947년 10월19일자)

점은 점쟁이 집 방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당의 굿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대구에서는 당시 비파산 약물탕 부근에서 죽은 처녀 배뱅이를 불러 위로하는 배뱅이굿이 성행했다. 내당동과 건들바위나 신천동 등지에서도 무당굿이 잦았다. 식량이 부족한 당시에도 굿을 할 때면 쌀밥을 아낌없이 버렸다. 거지들이 몰려와 굿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이유였다.

두 눈 뜨고도 눈먼 장님에게 제 팔자를 물어보는 모순은 그때도 입길에 올랐다. 장봉사가 정말 장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찾았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 사는 사람들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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