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생명윤리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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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8   |  발행일 2017-10-18 제31면   |  수정 2017-10-18
[영남시론] 생명윤리와 법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우리 사회가 고령사회로 접어든 뒤로 저승 문턱에서 발목이 잡힌 채 삶을 멈춘 사람들이 온 나라의 요양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폭증한 것은 고령사회가 된 탓도 있지만 사실 1997년에 있었던 보라매병원 사건이 미친 영향이 더 크다. 보라매병원 사건이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뇌수술을 받은 남편의 후속치료를 거부한 환자의 아내와,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퇴원을 허락한 의사에게 법원이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로 처벌한 사건을 말한다.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Letting die)과 죽이는 것(Kill)의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한 이 무지막지한 판결이 의료현장에 끼친 영향은 컸다. 병원에서 의사와 가족의 합의에 따라 시행되던 ‘희망 없는 퇴원(Hopeless discharge)’이란 관행이 사라졌다. 보호자가 살인죄로 처벌된다는 의사의 한마디에 가족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부터 무의미한 치료에 엄청난 의료비를 쏟아 부으며, 무의미한 삶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 그리고 낭비된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될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보라매병원 사건의 판결은 생명윤리의 기본원칙을 깡그리 무시한 판결이었다. 먼저 모든 의료행위는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 아래 시행되는 것이지, 의사 또는 법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라도 환자와 가족의 동의 없이 환자의 몸에 칼을 댄다면 그것은 의료행위가 아닌 살상행위다. 또 의료행위를 할 때는 좋은 결과를 지향하는 ‘선행의 원칙’과, 환자에게는 해악이 생기지 않는 ‘악행금지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선행의 원칙과 악행금지의 원칙은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어서 어느 한쪽만을 취하기 어렵다.

가령 뇌를 다쳐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에게 뇌수술을 하는 것은 ‘선행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이지만, 그 결과로 생명은 유지하였으나 식물인간 상태로 연명하게 된다면 그 의료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악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수술을 할지 말지, 수술 후에도 치료를 지속할지 말지는 법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례별로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 사이에 설득과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 ‘정의의 원칙’이다. 한정된 의료자원을 두고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막대한 의료비를 소모하는 것, 그리고 법이 경제적 약자에게 그 가족의 치료에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의 치료를 포기한 사람은 모두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하는가?

이런 생명윤리에 관한 원칙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긴 시간의 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특히 경제력이 없는 환자 보호자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생명윤리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기회를 아예 차단해버렸다.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의 낭비요, 삶을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리고 객사를 금기시하던 우리 사회의 오랜 장례문화를 한순간에 말살시켜 버렸다.

그 판결 이후 20여 년 동안 쌓여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법이 만들어져 시행에 들어간다.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이다. 그러나 그 법이 시행된다고 해서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법은 종합병원급 이상의 병원에 입원한 말기암 환자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자문에는 한 고조때 재상 소하가 살상행위자와 도둑질한 자만 처벌토록 법을 간소하게 하여 덕치의 기틀을 마련한 반면, 한비자는 번거로운 형벌 때문에 스스로 피폐해졌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何遵約法, 韓弊煩刑). 적어도 의료현장에서 설득과 합의에 기초해야 할 의료행위에 법이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객사가 보편화되고, 이 시대의 죽음이 몹시 피폐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법 만능주의가 불러온 참담한 현상이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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